유명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요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전에 유언을 했습니다. 그가 한 유언은 묘비에 새겨졌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용서받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더구나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여기서 ‘사망’은 단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라 불리는 지옥형벌을 의미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놀랍게도 이것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에게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마 7:21, 고전 6:9-10, 갈 5:19-21). 그러므로 신불신을 막론하고 가장 기쁜 소식은 죄 사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불신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백을 통해서 용서를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이단사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을 때 과거 현재 미래 죄가 다 사해졌는데, 왜 자꾸 회개기도를 하느냐?”고 하면서 자백을 반대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원관이 변질되다보니 목사들 중에도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는 순간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는다는 주장은 비진리입니다. 그것은 본문과 절대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백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무엇으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성령세례는요? 역시 믿음으로! 치유는요? 믿음으로! 축사는요? 믿음으로! 기도응답은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처럼 모두 믿음으로 됩니다. 그런데 자백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백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지만 믿지 않아 구원을 못 받고, 치유 기도를 받았지만 의심 때문에 치유받지 못하는 것처럼, 자백하고도 죄 사함이 믿어지지 않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찰스 프라이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교리적인 사실로는 쉽게 믿으나, 실제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믿으나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해서는 극도로 믿기 힘들어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여행, 설교, 상담 등을 해오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으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큼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았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의식의 공격을 받았으며, 때로는 같은 죄에 대해 거듭거듭 자백을 하고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한 여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성이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는 30여 년 전인 십대 후반에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죄책감은 필시 더 심했던 것 같았습니다. 30년 동안 그녀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거의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30년 전에 지은 그 죄에 대해 자백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자기가 무자격자라는 느낌 때문에 어떤 책임도 맡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고,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도 있었지만, 죄책감 때문에 그 일을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그 죄 때문에 자기가 좋은 아내와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병이 들었는데 의사는 치료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에 병의 원인은 분명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라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녀와 동일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적으로는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녀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죄책감은 필시 더 심했던 것 같았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십자가 우편 강도, 핍박자였던 바울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것은 믿기 전에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고 난 후 큰 죄를 지은 경우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심어준 비정상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기 전에 지은 죄나 믿은 후에 지은 죄나 죄는 죄일 뿐이고 모두 예수님의 피 공로로 사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원수였을 때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면 자녀들의 죄는 더욱 용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잘못된 인식을 버리고 자유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이비드 씨맨즈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모든 용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용서”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으로 자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