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둘레길을 비틀비틀 달리는 동안 나는 거의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다 눈을 뜨면 붉은 안개가 눈앞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얼마나 강인한지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이윽고 나뭇가지 저편에 다시 철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두 바퀴째 달리는 동안에도 무사히 살아남긴 했지만, 이제 앉아서 쉬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땅바닥에 드러누워야 할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났다.
“잘했다!” 하사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아주 잘했어. 그럼 이제부터 제자리뛰기를 하겠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소대는 신음 소리를 냈지만 하사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 두 발을 모으고 제자리에서 뛴다. 하낫! 둘! 셋! 동작 봐라! 더 높이! 하낫! 둘!”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내 가슴은 고통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였다. 우리 몸을 단련해야 할 사람이 내 심장과 허파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주다니.
“언젠가는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야. 내 말을 믿으라고. 자, 더 높이 뛰어! 하낫! 둘!”
맙소사. 하사는 웃고 있었다. 저놈은 새디스트야. 동정심을 기대하는 게 잘못이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펄쩍 뛰어오른 순간, 간밤에 블로섬의 꿈을 꾼 이유를 깨달았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1」중에서
일단 대러비를 벗어나자 나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차를 몰면 엔진과 차체가 요란하게 항의하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차가 금방이라도 분해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쏜살같이 차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돌담이나 포장도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주의는 온통 뒷좌석에 쏠려 있었다. 벌떼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소리는 더욱 사나워지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고, 그와 더불어 튼튼한 발톱으로 골판지를 찢어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레이턴 마을로 들어가면서 뒤를 힐끔 돌아보니 조지나는 상자에서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나는 뒤로 손을 뻗어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재스민 코티지’ 대문 앞에 차를 세운 순간, 한 손으로는 사이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고, 또 한 손으로는 녀석을 상자에서 들어 올려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시트에 깊이 몸을 묻었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폭발하듯 새어나왔다. 정원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베크 부인을 보았을 때는 긴장으로 잔뜩 굳었던 내 얼굴에 거의 미소가 떠오를 뻔했다.
---「11」중에서
우리는 말없이 팔을 닦고 셔츠를 입었다. 외양간을 떠나기 전에 그는 송아지를 살펴보았다. 송아지는 벌써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미가 송아지를 핥아주고 있었다.
“팔팔하군.” 에드워즈 씨가 말했다. “그런데 하마터면 저 녀석을 잃었을지도 몰라. 정말 고맙네.” 그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쨌든 가서 저녁을 먹음세, 수의사 선생.”
마당을 반쯤 질렀을 때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침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한테는 내가 지독한 바보처럼 보였겠지? 나는 한 시간 동안이나 소와 씨름하느라 죽을 뻔했는데, 자네가 나서서 순식간에 일을 끝냈으니…… 내가 계집애처럼 연약해진 기분이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에드워즈 씨. 문제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문제는 힘이 아니라 요령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다. 갑자기 그의 이가 하얗게 빛났다. 갈색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미소는 점점 커져서 폭소가 되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부엌문을 열었을 때 그는 벽에 기대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제기랄! 그런 식으로 나한테 앙갚음했군!”
---「21」중에서
그곳이 내가 새 출발을 해야 할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렸는지, 내가 다시 수의사 노릇을 감당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에 가지 않겠다, 아직은…….
내가 일자리를 찾아 대러비에 도착한 그 첫날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내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내가 갖고 있었던 것은 낡은 여행가방과 몸에 걸친 옷 한 벌뿐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헬렌과 지미가 있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나는 돈도 없고,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 한 칸도 없었지만, 아내와 아들을 비바람에서 지켜주는 집이라면 어디든 나에게는 개인적이고 특별했다. 샘도 아내와 아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교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먼 길을 걸어가야 했지만, 나는 자줏빛 줄무늬 바지에서 튀어나와 있는 뭉툭한 군화 앞부리를 내려다보았다. 영국 공군은 하늘을 나는 법만 가르쳐준 게 아니라 행군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몇 킬로미터쯤 걷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방을 다시 움켜쥐고 광장 출구 쪽으로 돌아서서, 곧장 집을 향해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33」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