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종교들은 신성한 이야기들―신화―을 간직하고 해석해 왔으며,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되거나 세속 정치 세력과 결탁하면서, 이와 같은 집단적인 신성한 은유들과 종교 자체가 이기적 목적이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오용한 예는 아랍, 인도, 인도네시아, 수단, 스리랑카 또는 북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극단론자나 극단적 종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류 기독교 역사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억압의 예들이 있다. 주류 기독교는 성모 마리아와 성령에 구현된 여성적 원칙, 예수가 유대 인이라는 점, 외경 복음에 드러난 “진실”, 예수가 몸소 전한 평화에 대한 본질적인 메시지, 자신의 지적/물리적 환경을 해석하려는 인간 사고의 자연스런 욕구 등을 억압해 왔다. 물론 근본주의의 왜곡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전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데서 훨씬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이슬람 및 유대교 근본주의자의 호전적인 독선 역시 신약 성서, 쿠란, 토라 그리고 세 가지 아브라함 계 종교들의 창시자들과 선지자들의 자비로운 가르침에 드러나 있는 관용과는 분명히 배치된다. 우리가 독실한 신앙심을 심리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면, 종교 신화의 오용은 우리가 꿈을 의식적으로 편집하거나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 꿈의 진정한 은유적 의미를 부인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깨달음으로 이어진 길을 봉쇄한다. 역사적으로 여러 문화에서 그랬듯, 우리는 신화를 성적/인종적 우월성이나 경제적 특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잘못 해석하여 결국 사회적 일체감을 스스로 차단하는 우를 범해 왔다.
<---제1장‘들어가며'신화 그리고 종교’중에서>
인류에게는 옛 이야기를 그저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야기를 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시각에서 보면, 새로운 과학이 발전하고, 모더니즘이 상대성 및 불확정성 이론등과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술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사조의 중요한 특징은, 신비한 힘을 지닌 확실한 상징들이 없는 상태에서 예술가들이 예술을 만드는 과정을 당면 과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반 고흐의 그림들에서 이 과정을 인식했다. 그의 그림들은 눈에 띄는 터치와 군데군데 보이는 빈 캔버스를 통해 예술가의 시선과 매체의 저항 사이의 투쟁을 드러낸다. 우리는 입체파 화가들에게서도 그런 면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림을 구성하는 형태들을 다양한 투시법으로 검토한다. 또한 예술과 화가의 개인적인 관계가 실제로 그림에 관한 그림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 표현주의 화가 또한 마찬가지다. 이 같은 경향은 리브 울만의〈부정不貞〉같은 최신작은 물론, 초기 모더니스트 베르토프의 ‘카메라로서의 눈’ 영화들과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누벨 바그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은 예컨대 퐁피두 센터나 구겐하임 미술관이 야훼의 창조나 그리스도 육신에 대한 은유라기보다는 건물 만들기를 나타내는 건물들인 것처럼,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들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옛날의 상징들을 택해, 새롭게 만들어, 우리가 새로 이해한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의〈십자가 수난〉은 특정 종교 사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간과 공간의 기하학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20세기 초, 입체파의 대작들은 특정 종류의 종교 체제를 반영하는 관습적인 형태들과 르네상스 투시법의 1차원적 논리를 지양하고, 캔버스 표면 위에 이 형태들을 동시에 드러내는 역동적인 구성을 추구한다.
<---제2장‘창조 신화 과학 그리고 모더니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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