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화폭에 난 상처가, 우리 세계에 뚫린 구멍이, 우리 자신의 텅 빈 자리가 실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곳이 된다면. 그곳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영혼의 찢긴 자리, 우리의 시야에 점점이 난 구멍들이 실은 이 혼돈의 세상 저편 가슴 시린 아름다움을, 그분을, 우리가 영원히 열망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가느다란 틈인지도 모른다.
--- p.36
정말 너무 놀라워 눈이 멀고 발을 헛디뎌 넘어질 정도의 장관과 맞닥뜨려야만 우리 흐릿한 영혼의 눈이 장대함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못지않은 장관의 놀이 날마다 이곳 우리의 일상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간과 안목만 있으면 된다.
--- p.48~49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사, 이 씨앗이 거대한 기적을 키워낸다. 감사의 기적은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빵 조각을 먹고, 마실 것 한 모금을 삼키는 데에 있다. 삶은, 범상치 않은 삶조차도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무한소를 놓치면 전체를 놓치게 된다. 삶을 변화시키는 감사는 한 번에 하나씩 구체적인 못을 박을 때 삶 속에 붙들어 맬 수 있다. (…)
빈 공간은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진다. 사소해 보이는 것에 감사드릴 때 내 안에 하나님께서 자라날 공간이 생겨난다. 이것이 나를 가득 채우고 하나님은 세상에 들어오신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시 69:30). 감사를 통해 우리는 작아지고 세상은 제자리를 찾는다. 나는 감사를 말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커진다.
--- p.84, 87
사탄이 내 눈을 가려 말씀을 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 시력이 나빠 빛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으로 온몸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이 나쁘면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영혼이 병든다. 빈 것은 정말 빈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렌즈로 사용하지 않으면 세상은 뒤틀린다.
--- p.128~129
영광의 무게가 내 두꺼운 비늘을 걷어내기를, 그 영광의 무게가 필사적인 물질주의의 사슬을 끊어버리기를, 생명을 마비시키는 환락의 껍질을 쪼개기를, 얼음처럼 딱딱해진 심장을 부수기를 나는 얼마나 바라는지! 나는 내 속마음을 속속들이 아시면서도 시들어가는 이 필멸의 육신 안에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뵙고 싶다. … 감사거리는 어디에나 있어서, 그걸 모든 곳에서 찾아내고 싶다. (…)
모든 아름다움은 무엇을 반사한 것이다.
내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내가 경탄하는 모든 피조물에서 내가 고개 숙이는 대상인 그분의 얼굴이 섬광처럼 지나간다. 그것이 피조물이 아니라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내게 있을까? 대롱대롱 매달려 현란하게 빛나는 싸구려 장신구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이 부서지고 깨질 때까지 모든 것에서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이 내게 있을까?
--- p.56~157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믿음 훈련의 최우선 자질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축복에 이름을 붙이던 몇 달 동안 이 말은 나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었다. 감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특징이다. 감사하지 않는 생활이 하나님에게서 나를 떼어놓았듯 감사하는 생활은 나를 하나님께로 되돌려주었다. 감사는 기독교
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감사가 믿음 훈련의 최우선 자질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감사가 신뢰를, 진정한 믿음을 낳기 때문이다.
--- p.211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 대신 선물을, 우리 몸을, 우리 시간을, 우리의 이 생명을 자비롭고 열정적으로 내려주신다. 하나님은 권리를 주시지 않고 사랑의 선물에 응답할 책임을 지워주신다. 나는 알고 있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이 순간의 선물에 한심하게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사실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 순간을 받아들이기를 거만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결코 선물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다. 감사란 늘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 p. 244
세탁이 우리 아이들의 열두 팔과 열두 다리를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들이 내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탁은 골치 아픈 일거리가 되고, 기쁨에는 벼락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면 설거지도, 빨래도, 잡일도 모두 그분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가 되고, 기쁨이 쏟아진다. 그리스도께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사랑 넘치는 종이 된다.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맞추면, 두 손으로 언제나 예수님의 발만 씻기면 우리 몸이 기쁨을 노래하고, 일은 가장 순수한 상태로 돌아간다. 일이 감사의 예배가 된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우리의 일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일이 기도가 되면… 그것을 예수님께 하면, 예수님을 위해 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 p.267~268
그동안의 기독교적 훈련, 성경 공부, 교회 참석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감사 연습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처음으로 꼼꼼히 따져보게 되었다. 쉼 없이 뒤쫓는, 말도 안 되는 그분의 담대한 사랑. 모든 곳에,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단순한 믿음을 뛰어넘어 그분 안에 살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늘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다(살전 5:18). 이것이 바로 완전한 교제다.
--- p. 283, 299~300
감사 수첩이 여느 때처럼 싱크대 위에 펼쳐져 있다. 순간을 헤아리고 그분의 사랑을 적어 넣는 수첩. 이처럼 수를 꼽는 삶의 본모습을 체스터턴은 이렇게 요약했다. “가장 위대한 시는 재고 목록이다.” 나는 헤아리기의 한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웃는다. 나는 숫자 세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노래를, 그분의 마음의 운율을 문자로 옮기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과 나, 한 쌍. 천 개의 선물을 세고, 하루에 백 번 거룩하신 분을 축복하고, 세탁실과 부엌과 병원과 포도밭과 고속도로와 샛길과 일하러 가는 길과 활활 타오르는 별들의 길을 채우시는 그분의 존재와 교제하리라. 그분의 존재가 나를 채운다.
이것이 바로 충만한 삶이다.
--- p.309~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