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론자였던 나는 기적이 존재한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주의에 전념한 나머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가정을 미리 세워놓고 범죄 현장에 들어가는 것을 경험한 이후, 나는 내 자연주의적인 성향을 잠시 뒤로하고 공정해질 것을 결심했다. 결론을 정해놓고 수사를 시작할 수는 없다. 만일 증거가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한다면, 분명 기적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분은 우주만물의 창조자가 되신다. 그분은 비물질에서 물질을, 생명이 없는 것에서 생명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분명…기적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시작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보다 못한 기적들(예를 들어 물 위를 걷거나 눈먼 자를 고치는 일)은 사실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진리를 배울 생각이라면, 나는 기적에 대한 내 가정들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하는 데 범죄 현장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 쉽고 빠른 자연적인 설명을 찾지 못할 때마다 곧장 초자연적인 설명으로 달려가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증거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로, 심지어 그것이 기적을 행하는 설계자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해도, 그것을 따르기로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다.
--- 「1장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중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목격자” 즉 사람의 관찰과 기억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나누기에 앞서, 보통 나는 “왜” 성서가 우리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전달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펼친다.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을 목격자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은 도덕적인 허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 두 귀로 들은 것, 두 손으로 만진 것을 기록했다. 우리는 성서에 대한 “신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의 회의적인 친구들이 개인적이고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의 본질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 가운데 다수는 이제껏 살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방식을 영원히 바꿔버린 무언가를 보거나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그것이 복음서 저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들의 목격은 그들 자신을 영원히 변화시켰고, 그들의 증언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 「4장 “목격자를 검증하라”」 중에서
플레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으며 복음서 저자들의 여러 주장을 부인했지만, 그의 진술은 예수에게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과 예수가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기간 중에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다.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의 이런 저술가들은 기독교에 우호적인 친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이제 막 시작된 기독교 운동에 대체로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생애를 입증하는 중요한 세부사항을 제공한다. 기독교의 모든 문서가 소실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작가들로부터 예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묘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12장 “증거는 입증되었는가”」 중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배심원들이 목격자의 신뢰성을 판단할 때 숙고해야 하는 네 가지 중요한 영역을 전부 검토했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복음서 저자들이 (1) “현장에 있었고” (2) “입증되었으며” (3) “정확했고” 그들에게 (4) “편견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증언이 “믿을 만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그 기록의 신뢰도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했던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배심원으로서 우리는 성실하고 신실했으며 증거를 고려했다. 이제는 결정을 내릴 시간이다.
--- 「14장 “그들은 편견을 가졌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