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병원은 1,000년 이상 전에 이슬람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매우 공을 들인 병원이 칼리프 알라시드(al-Rashid; ?천일야화?의 칼리프)의 통치 기간인 8세기에 세워졌다. 그 뒤로 이슬람 영토 여러 곳에 이와 비슷한 병원들이 차례로 생겨났다. 병원들은 칼리프, 토후, 자선가, 종교 단체의 기부금으로 유지되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 인재들이 관리했다. 정복 아랍인들은 6세기경 군데샤푸르에 설립된 유명한 페르시아의 의료 학교와 병원들처럼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미 세워져 있던 훌륭한 의료 기관을 지혜롭게 보존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십 개의 무슬림 병원을 소아시아와 마그레브 지방(무슬림의 용어로 북서 아프리카 해안 영토를 지칭한다)에 건립했다. (본문 186p)
* 궁극적으로 학문이 두 부문, 즉 이슬람 학문과 ‘고대’ 또는 ‘외래’ 학문으로 나누어짐에 따라 결국 무슬림들의 사고 또한 나누어지게 되었다. 종교와 종교 관련 문제를 다루는 정통 이슬람 학문과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으로 물질 세계의 지식을 탐구하는 고대 그리스 학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점점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이 종교적 지적 의견의 불일치는 천문학과 의학 등 고등 교육을 소수 엘리트에게만 제한함으로써 더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부하는 중세의 무슬림 학생들은 정규 교육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통 왕궁이나 왕궁의 후원을 받는 개별 학자들이 가르치는 기관에서 교육받았다. (본문 271p)
* 무슬림들이 서구를 연구하고 그 사상, 수단, 관습의 일부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까지 서구는 근본적으로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문예부흥에 몰두해 있었다. 17세기 말까지 지중해 연안의 북동부, 동부, 남부 지역의 거의 반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의 지도자들과 외교 사절은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구의 새로운 제도에 주목했지만, 대부분은 전쟁 기술, 제국을 통치할 행정 기술과 관련된 것이었다. 제국의 군사적 정복은 대부분 성공했지만, 점점 강해지는 유럽의 경제적?정치적 세력과 경쟁과 분쟁 상태에 있던 오스만 제국은 제국의 시민 사회를 근대화할 과업에 직면해야 했다. (275p)
* 중세 유럽 말기의 사상가와 학자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유입된 과학적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사고에는 확장된 그리스이슬람의 지적 유산에 담긴 자연철학의 개념도 포함되었다. 흔히 무슬림들의 해석과 수정에 의해 여과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결합하여 철학적?과학적 연구를 광범위하고 강하게 부추겼다. 이 연구에는 신학, 형이상학, 수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이 포함되었다. 이 정력적인 지적 활동은 상당 부분 중세 말기 유럽에 세운 대학교와 학원의 후원을 받았으며, 여기에는 전례 없는 규모로 성장하고 변화한 제도적 자원이 있었다. (본문 294p)
* 르네상스의 출현 후 4세기에 걸쳐―개혁과 반개혁, 혁명과 반혁명, 수십 년 동안의 전쟁과 평화, 파괴와 진보를 통해―서구의 문명은 현대적 형태를 띠었다. 지난 500년 동안 예술 분야에서 서양의 업적이 두드러졌다면, 서구가 이슬람 문명에서 물려받은 그리스이슬람 유산이 깊이 뿌리박힌 서구의 과학도 더욱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이 무슬림의 선물이 점점 종교를 무시하고 인간적인 과학 정신을 조장하였다는 것은 반어적이다. 동시에 위대한 중세 과학자들이 울라마(종교학자들)의 엄격한 인권 박탈과 편협한 혹평에 저항해 왔다는 점에서 이슬람 세계는 점점 신학적으로 폐쇄된 문화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는 활발하고 독창적인 과학적 노력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500년 전 근대의 출발 시기에 확대되기 시작한 동서의 문화적 대화는 심하게 위축되어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에 이르고 있다. (본문 295~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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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은 세계 3대 일신교 가운데 맨 나중에 생긴 종교이다. 이슬람은 인간 행동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슬람은 인종, 국가, 그리고 정치적 동맹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보편 신앙과 언어를 통해 그 신자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섯 명 중 한 명을 서로 통합시키는 지적?정서적 힘이다. 이슬람 문화는 언제나 정신적 비전의 통합 안에서 양식과 표현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보여 주었다.
비잔틴과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초기 문화 계승자로서 무슬림들은 그 많은 부분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며 전 시대의 혼합적 유산을 수용하였다. 그들의 문화적?정치적 경험은 중세 서유럽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서유럽에서 무슬림의 업적은 르네상스의 발전에 필수적 역할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후대 사회 형성에 한몫을 했다. (본문 17~18p)
* 9, 10, 11세기의 황금기 동안 무슬림 세계의 전례 없는 지적 팽창을 자극한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단순한 인간의 호기심이었다. 새로운 문명의 신앙, 세상에 대한 ?꾸란?의 가르침, 그리고 지적 자원으로 점점 풍부해진 언어와 함께 이 지적 호기심은 무슬림들이 그들 주변의 모든 것을 탐구하도록 재촉하였다. 무슬림들은 그들 세계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열적으로 이룬 업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 과학혁명, 계몽시대, 산업혁명 초기의 업적들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문화적 결실은 곧 분명해졌고, 그것은 예술과 과학 두 분야에서 중요하고 독특한 성취로 이어졌다. (본문 42p)
* 이슬람 문명의 초기 몇 세기 동안, 철학적 사색에 대한 무슬림의 집착은 강하고 모험적이어서 순수한 이슬람이 아닌 여러 개념들을 몰아내려는 산발적 시도들을 물리치고 살아남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헬레니즘 철학의 요소들이 무슬림 철학 안에 깊이 지속적으로 침투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종교 철학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중세 이슬람 철학은 역사상 위대한 지식인의 반열에 들 많은 걸출한 위인들을 낳을 정도로 매우 활발했다. 이들 중 다섯 명이 특히 유명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모두 논쟁을 유발했고, 대부분 강력한 정통파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본문 45p)
* 중세의 초기 기독교 유럽에서 실제로 모든 지적 활동의 목적은 종교적 신앙이나 미신을 끌어들여 우주의 창조, 형성, 운행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이성에 입각한 개념들은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초기 무슬림 철학자이며 과학자들은 우주의 섭리를 조사할 때, 그들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받아들인 지식의 체계, 즉 당시 서유럽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지적 유산을 인용했다. 기본적으로 무슬림들은 이슬람 계시의 가르침을 따랐다. ?꾸란?에서 설명된바 모든 현상의 통일성에 관한 믿음은 과학, 특히 철학적 학문의 분류와 더불어 우주학을 촉진시켰으며, 전체적으로 광범위한 접근 방식을 반영했다. 한편으로 우주 연구는 직접적인 관찰이나 완전히 합리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수 있는 차원을 넘어 형이상학적이고 신비한 사색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찰된 현상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천문학적 관찰과 수학적 분석이 있었다. (본문 71~72p)
* 숫자를 표시하는 손가락 계산법 이외에 무슬림들은 또한 두 가지 다른 계산 체계를 물려받아 사용했다. 그 첫 번째는 알파벳 글자로 수를 나타내는 고대 바빌로니아 수 체계이고, 두 번째는 9의 모양에 의한 숫자와 빈 공간을 나타내는 상징인 0에 의해 어떤 수도 다 표현할 수 있는 더 우수한 수 체계이다. 인도에서 유래한 이 계산법이 이슬람 세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숫자는 이슬람의 동부와 서부 지역에 따라 약간 다르게 쓰였다. 10세기경 유럽에 전파된 것은 서부 지역 형태이며, 아라비아 숫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본문 90p)
*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한 발전을 이룬 것은 훨씬 더 작은 천체 관측 기구의 개발과 개선이었다. 특히 천체 관측 기구인 아스트롤라베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쓰였던 아주 중요한 계산 기구였다. 기원전 2세기경 그리스인의 발명품으로 추정되는 아스트롤라베는 무슬림들에 의해 그 기능이 현저히 향상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무슬림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놀라울 정도로 아담하고 작은 이 장치는 매우 다양한 천문학적인 문제와 시간의 기록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 복잡한 기술자의 계산자, 또는 심지어 아날로그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한다. 다섯 번의 무슬림 예배 시간과 메카의 방위를 결정하는 것 외에 지리적 위치 선정에 사용할 눈금이 있고 교체가 가능한 금속판으로 구성된 중세의 아스트롤라베는 일년 내내 많은 종류의 천체와 시간 기록 자료, 방위의 측정, 점성술 정보 등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중세 말기에 유럽에 소개되어진 후 아스트롤라베는 제프리 초서가 쓴 유명한 글을 포함해서 많은 책의 주제가 되었다. (본문 109p)
* 페르시아의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알비루니는 점성술 안내서를 만들었으나, ‘별들의 섭리’가 정확한 과학에 속한다고는 거의 믿지 않았다. 점성술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대는 14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저명한 역사 철학가인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Muqaddima, An Introduction to History)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븐 할둔은 지구에 미치는 별의 영향을 부정했고, 신을 유일한 대리인으로서 묘사했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점성술적 업적은 인류에게 해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무슬림 신학자들은 운명 예정설, 그리스 철학, 다른 ‘외래 과학’ 등 점성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반대했다.
종교법은 물론 종교학자들이나 유명한 철학가와 문학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세 무슬림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여 공적이고 사적인 예언을 하는 등 맹활약했다. 만약 칼리프가 새로운 군사 원정이나 새 도시를 건설하려 할 경우, 궁정 점성술사들은 공격 시간이나 주춧돌을 놓기 위한 시간을 결정하도록 명을 받았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려 할 때 별과 행성을 이용해서 수술하기에 불길한 시간과 상서로운 시간을 알아냈다. 또 선원이 폭풍우를 만난 자신의 배가 항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알고 싶을 때, 병든 왕이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때, 슬픔에 잠긴 상속인이 자신의 예상 상속 재산을 알고 싶을 때, 지방이나 가족의 점성술사들을 불러 점을 쳤다. 다가오는 수확이 특별히 걱정될때, 농경 사회에서는 차원이 낮지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똑같은 관례를 따랐다. (본문 156~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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