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개혁이나 신학의 개혁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새롭게 하면서 세상을 바꾼 사건이었고, 그것은 무엇보다 종교개혁이 시작한 교육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개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인을 위한 ‘교육’의 개념을 발견하게 했고, 그것으로서 당시 성직자나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던 ‘교육’을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종교개혁은 모든 사람이 신분이나 계층을 막론하고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개발하도록 교육의 혜택을 받는 근대적 세상을 활짝 열어젖히는 통로가 되었다.
--- p. 4
“개혁”이란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 즉 기본 패러다임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은 교회나 신학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킨 통전적 개혁이었고, 그 무엇보다 ‘교육의 개혁’이었다. 그래서 유럽, 그중에서도 특별히 독일의 교육은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있다.
마틴 루터는 일차적으로 신학자이자 목사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를 교육학자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이었고, 그 과정에서 교육의 개혁이 함께 시도되었다. 루터의 교육개념은 그의 종교개혁적 신학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그의 종교개혁은 교육을 통해서도 관통하고 있다
--- p. 15
루터가 “믿음”을 중시한 순간 필연적으로 “교육”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데, 믿음이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믿게 되는 것(fides qua creditur)”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내용(fides quae creditur)”을 가르치는 일을 면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가 역시 중요해지고,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 그를 위해 가르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가 믿음을 중시한 순간, 그의 관심은 믿음의 내용과 그것을 가르치는 교육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이신칭의” 사상으로 시작한 “종교개혁”은 필연적으로 “교육개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계시의 자리는 언제나 교회의 몫이었고 성도들은 굳이 말씀을 읽거나 기독교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더불어 이러한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 교회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하며, 그를 위해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요청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 p. 20
오늘날 개신교 교육목회의 뿌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개신교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칼뱅을 비껴갈 수 없다. 물론 칼뱅 당시에 오늘날 기독교교육 영역에서 말하는 ‘교육목회(teaching ministry)’의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칼뱅이 스스로를 교육목회자로 칭하지도 않았다. 칼뱅은 단지 그의 목회지였던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에서 그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목회전반에 걸쳐 통전적으로 수행했을 뿐인데, 이것이 오늘날 개혁교회 교육목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칼뱅이 추구했던 종교개혁적 목회 자체가 이미 본질적으로 교육목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p. 70
칼뱅의 교회론에 나타난 교육목회의 핵심개념은 무엇보다도 교육목회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것은 철저히 ‘말씀’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혁교회 기독교교육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이 언제나 다시금 돌아가야 할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이지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그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성숙시키는 하나님 교육의 수단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어떤 인간적인 능력이나 수단에 의지하는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교육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변화시키는 힘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이것은 수많은 매체가 발달되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된 현대의 기독교교육 상황에서도 언제나 진리이고, 우리가 늘 돌아가야 할 ‘기본’이다.
--- p. 111
코메니우스의 평화교육사상은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에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앎’이 어떠한 앎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을 준다. 코메니우스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앎은 객관적 지식의 조각을 습득함으로써 오는 현상이 아니라, 신앙인을 신앙인으로서 ‘형성시켜주는 앎’이어야 한다는 통찰을 준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앎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하나님 관계를 바로 세우고, 우리와 인간과의 관계, 우리와 자연(세상)과의 관계를 바르게 형성시켜주는 앎, 즉 ‘관계적’ 앎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도전을 준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교육이 하나님을 삼인칭으로 ‘그분’에 관해 가르치는 것(teaching about God)이 아니라, 그를 이인칭으로 마주 대하고 관계 맺는 교육, 즉 여호와 사랑하기를 가르치라는 말씀이(신 6:4-9) 의미하듯,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 맺으며 알아가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을 도전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교육이 다른 사람과 인격적 관계성 안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는 관계적 앎,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며, 알아가며,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하는 관계적 앎을 추구하도록 도전한다.
--- p. 185
위기의 상황에 처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본질을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질을 생각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출발점에 다시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회가 출발하게 된 모태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이다. 우리의 교회가 스스로를 개신교회라고 칭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교회가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으며 따라서 그 정신을 언제나 새롭게 기억하고 그것에 우리를 비추어 보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교육의 위기도 우리 교회와 기독교교육의 모판이자 본질인 종교개혁적 전통에 비추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