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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늘
이외수 | 해냄 | 2010년 09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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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76쪽 | 545g | 128*188*30mm
ISBN13 9788973373086
ISBN10 8973373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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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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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 장의 낱말 카드를 한 번만 보고도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모조리 외워버리는 나의 기억력은, 면담자들로 하여금 나를 양자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여섯에다 일곱을 더하면 얼마냐 하는 따위의 질문이 던져지기만 하면, 어김없이 나만의 수리법대로 정답을 산출해 내는 계산력 때문에 그 가치가 상쇄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체구가 작다는 단점과 출신성분이 불분명하다는 결점도 매번 크나큰 장애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그날부로 영아원에서 양부모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포기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양자로 입적시킬 정도로 마음이 자비로운 인격체들은 모조리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의 총에 사살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2 마지막 면담자들〉 중에서

“너 고아원에서 탈출한 아이지.”
갑자기 사내가 은밀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나자빠져버릴 지경이었다. 마치 감전이라도 당해 버린 듯 전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강경한 어조로 황급히 사내의 추측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나는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단다.” 사내가 말했다. “아니라니까요.”
나는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정직하게 말해도 괜찮단다. 나도 너만한 나이 때 고아원을 탈출했지. 사흘을 굶고 나니까 눈알이 뒤집혀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까지 구운 감자로 보였단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배고픔이라는 사실을 너도 이제는 잘 알고 있겠구나. 너는 며칠이나 굶었니.” “저는 지금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
나는 부인하고 나서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결국 굶어죽고 말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11 맹인의 눈 속보다 캄캄한 세상〉 중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번개손이었다.”
아버지는 천도척의 수하에서 철두철미하게 소매치기 교육을 이수했고,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소매치기로 군림하게 되었다. 천도척이 노환으로 세상을 하직할 무렵쯤에는 기술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번개손은 아직도 소매치기들 사이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오로지 맨손으로만 승부를 겨루는 정통파 소매치기였다. 절대로 면도날 따위로 양복이나 핸드백에 손상을 가하는 야만적 행동은 저지르지 않았다. --- 〈15 번개손〉 중에서

“기술과 요령을 터득하고 응용하는 속도가 나보다 몇 배나 빠르구나.”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칭찬해 주었다. 나는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아버지의 비술들을 전수 받기 위해 거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열성을 나타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방울 소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한 개의 방울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마침내 나는 한 개의 방울 소리도 울리지 않고 핸드백을 닫는 과정까지 통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 완벽한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16 정통 소매치기 교본〉 중에서

“어쩌면 형사들이 저를 붙잡으러 올지도 몰라요. 그러면 저는 처음부터 여기 없었던 걸로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다시 보육원으로 끌려가야 되거든요.”
“무. 슨. 일. 이. 있. 었. 니.”
“여기서 어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빨리 도망쳐야 해요. 자리를 잡으면 전화를 드리겠어요. 누구한테도 제가 여기 있었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는 거 잊어버리지 마셔야 해요. 아시겠지요.”
나는 집으로 달려가 증거가 될 만한 흔적들을 모조리 인멸시켜 버린 다음, 조 선생 부인에게 나머지 일들을 당부해 놓고 서울로 가서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필요한 것들은 배낭 하나 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법무부 장관보다 더 강력한 빽은 오리발이고, 오리발보다 더 강력한 빽은 토끼발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 〈24 토끼발〉 중에서

“처지가 딱하게 되었구나.”
그날부터 나는 당분간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격외선당(格外仙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암자에 혼자 살고 있었다. 조그만 암자였다. 춘천의 서면 금산리 야산 골짜구니에 외따로 소재해 있었다. 친분이 두터운 어느 노스님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신도들이 절을 지어 주지로 모셔가는 덕분에 할아버지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산을 마주하면 산하고 나이가 같아지고, 강을 마주하면 강하고 나이가 같아지니까 몇 살인지는 네가 계산해 보아라.”
내가 던지는 그 어떤 질문에도 할아버지는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선계(仙界)라고 대답했고, 선계가 어디냐고 물으면 신선(神仙)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선동(仙童)이라고 불렀고, 자신을 신선이라고 자처했다.
--- 〈27 격외선당(格外仙堂)〉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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