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기(1863-1882) -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주 나羅씨, 나용집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두영斗永이고 뒤에 인영寅永으로 바꾸었으며, 단군교를 중광한 뒤에는 철喆을 이름으로 하였다. 흔히 알려진 홍암弘巖은 단군교를 중광한 뒤부터 사용한 도호道號 이다.
1872년 (10세)
호남의 석학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0세에 국문을 해득하고 한학 서당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정이 많았다. 청소년기에는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1878년 (16세)
처음으로 전남 순창군 향시에 나아갔다.
- 출사기(1882-1895) -
1882년 (20세)
서울의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과업에 전력했다.
1891년 (29세)
장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사관史官?정7품)가 되고 곧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사관직을 수행하면서 국왕 고종의 행차에 배종하는 등 왕의 주변에서 근무하였고, 고종으로부터 말과 관복을 하사받는 등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보름 만에 관직을 내놓았고 고종은 세 번이나 반려했다가 윤허했다고 한다.
1895년 (33세)
관직을 물러난 지 2년 뒤 조정에서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하지만 사양한다.
- 야인시대(1895-1903) -
1895년 (33세) - 1903년 (41세)
1893년부터 다시 상경하여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기 전 1903년까지의 기간 동안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으며 관직에서의 출세기회를 버리고 낙향을 결심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의감이 남달랐던 그는 당시 정국의 부조리함을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뒷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 단군교를 창립하는 데까지 이른 사상적 배경이 형성된 시기로 보인다.
이 기간은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열강들의 경쟁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해갔다. 국내적으로는 내정개혁 요구와 반일투쟁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동학파, 개화파, 위정척사파의 대립과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 독립운동기(1904-1908) -
1904년 (42세)
서울로 상경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오기호, 이기, 최동식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는 한편 국채상환운동에도 참여하고 애국계몽운동단체인 호남학회에도 가입하여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분투한다. 일제가 한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일본 정객들에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한, 일, 청 삼국이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서 부조扶助하라”고 말하고 그것만이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이 다 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동양삼국평화론’은 뒷날 안중근의 사상으로 발전하고, 임시정부의 외교이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5년 (43세)
미국의 중재로 러?일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오기호, 이기, 김인식, 정훈모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서 포츠머스 회의에 정식대표로 참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고 있던 일제가 여권 발부를 거부하여 미국행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미국행이 좌절되자 이기, 오기호 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여 이등박문 등 일본 정계 요인들을 직접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천황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항의를 단행한다. 그러나 일제는 11월에 이등박문을 한국에 파견,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귀국한 뒤 12월 30일 서울 광화문 대로에서 백두산에서 온 두암頭岩 백전伯佺 노인에게서 백봉신형白峯神兄이주었다는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받는다. 뒷날 이 책들이 대종교를 일으키는 노상봉교路上奉敎가 되었다.
1906년 (44세)
5월 12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고 9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등 외교를 통한 독립의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아무 소득이 없자 귀국하여 오적처단을 결심한다.
1907년 (45세)
오적처단 준비작업으로 자신회自新會라는 행동단체를 조직한다. 2월 12일 결사대는 거사를 실행하나 준비 부족으로 모두 실패한다. 이 사건으로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그의 거사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었고, 고종도 특사를 내려서 5개월 만에 석방된다.
1908년 (46세)
11월 네 번째로 도일하여 항일외교를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12월 9일 일본 동경에서 백봉 신사의 사자를 만나 단군교 창시를 결심하고 귀국한다.
- 대종교 중광기(1909-1916) -
1909년 (47세)
1월15일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단군 신위를 받들고 단군교를 중광한다. 오기호, 김윤식, 김인식, 이기, 정훈모 등 한말의 우국지사들이 참여하였으며, 나철은 교단의 최고책임자인 도사교都司敎가 되었다.
1910년 (48세)
8월 5일 단군교를 대종교로 고쳤다.
1911년 (49세)
7월 21일 단군 고적과 영적을 탐방하기 위해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참배하고 평양의 숭녕전崇寧殿을 참배하였다. 백두산 북쪽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 마을에 이르러 교당을 세우고 산북지사山北支司를 설치하였다.
1912년 (50세)
3월 3일 <삼일신고>를 출간하였다.
1914년 (52세)
5월 13일 대종교 총본사와 고경각을 지어 총본사를 서울에서 황룡현 청파호로 이전하였다. 4도 교구를 정하고 교계를 정하였다. 서울에 남도본사, 청호에 동도본사를 설치하였다. 청호의 총본사는 이후 30여 년간 독립운동의 근거지요 단군 신아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1915년 (53세)
10월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발포하여 대종교를 종교단체를 가장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 불법화시킨다.
1916년 (54세)
7월 강화도 마리산에 올라 제천하고, 8월 4일 서울을 떠나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폐식법閉息法으로 자결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