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물에 관해 단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한다. 세상과 나를 중개하기 위해 반드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언어 없이도 우리는 감각을 통해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새의 노랫소리, 아름다운 꽃의 향기,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직접 느낄 수 있다. 또 우리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안다. 의식적인 경험에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생각보다 더 크고 포괄적이다.--- p.32
삶과 생각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자동 조종 모드에 양도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습관은 습관적 생각을 촉발하고 습관적 생각은 더 많은 생각을 일으켜 결국에는 훨씬 더 많은 습관적 생각을 만들게 된다. 사소한 부정적 생각과 느낌이라도 우리의 감정을 확대시키는 일정한 패턴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뿌리 깊은 스트레스와 불안, 슬픔의 감정에 압도당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지 않는 생각과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그것들의 힘이 이미 너무 커졌을 수도 있다. 친구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슬퍼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수도 있다. (중략) 그러면 통제권을 상실한 것에 자책감을 느낀다. 이렇게 부정적인 악순환이 또 다시 시작된다.--- p.105
생각들은 아무런 두서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략)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어른에게 이것저것 내미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우리 마음이 하는 일이란 이런 것, 즉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생각)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함에도, 우리는 이런 선택 능력을 너무 자주 잊고 산다.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생각이 곧 실재라고 믿는다. 또 우리 마음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여긴다.--- p.121
생각 비우기나 마음 통제는 명상의 훌륭한 ‘부산물’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명상의 ‘목적’은 아니다. 만약 명상을 하는 목적이 마음을 깨끗이 비우는 것이라면 당신은 매우 힘센 상대와 어려운 시합을 벌여야만 할 것이다. 마음챙김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패턴을 현미경처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게 되면 생각이 방황하기 시작할 때 그를 관찰할 수 있다. (중략)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림이라는 더 큰 공간 속에 부드럽게 담아 안아 그저 관찰하는 것만으로 생각의 힘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생각은 거짓말처럼 녹아 없어지고 미친 듯 날뛰던 마음은 고요해진다. 이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일어나는 생각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pp.167-168
받아들임은 잠시 멈추는 시간, 그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두고서 더 분명하게 보는 시간이다. 받아들임은 우리가 경솔하게 반사적 반응을 취하지 않도록 여유를 준다. 받아들임은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온전히 자각하게 한다. 어려움에 동반한 모든 고통스러운 느낌을 자각하면서 우리는 그 어려움에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받아들임은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벌어준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가장 현명하게 반응하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 p.211
한 그룹의 노인들에게 병실 안의 식물에 물을 주고 충분한 영양과 햇빛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말해주었다. 또 다른 그룹의 노인들에게는 간호사들이 대신 할 것이니 병실 안의 식물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두 그룹의 노인들의 행복감을 조사한 결과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식물을 가꾸라고 한 노인 그룹의 행복감과 건강 수준이 다른 그룹보다 훨씬 높게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수명도 더 길었다. 살아 있는 다른 생명을 돌보는 행위만으로 삶의 질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p.229
사람들이 이처럼 불특정한 방식으로, 즉 사건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떠올릴수록 과거를 놓아버리는 데 더 어려움을 겪으며, 현재의 삶에서 잘못되어가는 일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략) 2007년에 리처드 브라이언트는, 과거 화재 진화 작업에 참여한 사건에 대해 불특정 유형의 기억을 보이는 소방관들이 진화 작업 중 목격한 참상에 더 쉽게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240
우리는 종종 자기 생각이나 느낌에는 잘 공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나약함의 표지로 치부하며 억압하려고 한다. (중략) 무시보다는 경청과 이해가 필요하다. 왜 그런 생각이나 느낌이 생겨나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도 계속 아기가 울 때는, 그저 따뜻한 연민의 마음으로 아기를 품에 안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있어줄’ 뿐이다.--- p.254
동기가 행동을 따라온다. 행동을 먼저 취하면 동기는 저절로 생겨난다.
--- p.282
심리학자 수잔 놀렌 혹스마(Susan Nolen Hoeksema)는 반추와 그 영향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뚜렷한 결론을 얻었다. “반추를 하면 기분이 더 나빠질 뿐이다.”
우리는 답을 찾아내지 못해 좌절을 겪는다.
일이 왜 잘못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에 실패하고 어려웠던 기억을 되살린다. 그러나 이렇게 약점과 결함에 초점을 맞추면 더 아래로 끌려 내려갈 뿐이다.
우리는,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다음 날, 다음 주, 다음 달에는 직면해야만 한다는 가능성에 몹시 두려워한다.
심지어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할 수 있다.
불행한 느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그런 느낌을 없애버리려는 우리의 시도는 자꾸만 가라앉는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시도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 더 심해지고 더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기분은 더 불행했던 기억과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계속해서 반추할 수 있는 새로운 소재가 된다.
과거에 임상적 우울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반추를 하면서 또 다른 우울증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 p. 33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보호를 위한 방법으로 불쾌한 감정을 무시한 채 끝내버린다. 길게 보면, 이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불쾌하거나 유쾌한 모든 감정들로부터 점점 더 무감각해짐을 의미한다. 이렇게 살게 되면 삶의 잠재적인 풍요로움과, 자기의 마음과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치유를 위한 잠재력으로부터 차단된다. 경험이 즐거운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 단순히 감각에 직접 주의를 기울이면 넓은 감정의 세계로 다시 연결되고 살아 있다는 경이로움을 보다 완벽하게 느낄 수 있다.
--- p.112
생각을 멈추거나 통제하기 위해서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멀리 쫓아버리거나 억누르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기억하라. 만약 생각을 억누르거나 멀리 쫓아버리려고 애쓰게 되면, 그 때문에 오히려 생각에 더 많은 힘을 싣게 되어 생각이 더욱 강하게 되돌아온다.
우리의 목적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능한 한 그 생각들이 흘러가게 하고 호흡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 p.127
호흡으로 주의를 이동하는 것을 배우면 반추, 걱정, 강박적인 계획 세우기 등에서 벗어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마음이 머무는 대상을 바꾸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행위양식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 p. 139
이러한 생각에 대한 믿음은 기분이 변화하는 만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에 대한 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보다, 마음이나 기분의 기저에 깔린 우울한 상태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생각에 대한 믿음은 생각이 오고 가게 하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변화한다.
우울증으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든가 진실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증상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싫어하는 반응도 덜 하게 될 것이다.
--- p.156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을 바라볼 때, 혐오감을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혐오감을 쌓을 뿐이다. 혐오감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온화하고 부드러운 알아차림으로 혐오감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계속해서 탐색하면서, 혐오감을 있는 그대로 (‘혐오감’이라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인식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혐오감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이다.
혐오감에 대한 능숙한 대응은 ①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② ‘혐오감’이라고 이름 붙이기, ③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지나갈 때까지 있는 그대로 기꺼이 허용하기, ④ 혐오감이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온화하고 부드럽게 주의를 가지고 계속해서 탐색하기이다.
--- p.167
요시가 의도적으로 고통스러운 감정과 혐오감에 주의를 돌려 몸의 감각을 경험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기적적으로 거의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상황이 불만을 촉발시켰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혐오는 요시의 몸과 마음을 점령하고 피드백 순환(불만 → 분노 → 혐오 → 분노 → 혐오…)에 걸려들게 했다.
이러한 순환은 혐오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분노를 실제로 지속시키는 것은 회피이다. 마음챙김하면서 몸 안의 감각들로 향하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접근을 통해, 요시는 저절로 계속되는 이러한 순환에 먹이를 주는 것을 중단했다. 그 결과는 즉각적인 평화였다.
그 경험들은 MBCT의 중심 메시지를 강조한다. 즉,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힘들고 불쾌한 것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이지, 불쾌한 감정이나 감각 자체가 아니다.
--- p.178
우리는 의도적으로 모든 경험을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혐오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한다. 경험이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허용하고, 경험을 판단하거나 다르게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분명히 봄으로써, 그것이 무엇이든, 바꿔야 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 p.191
아주 중요한 것은 생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배우는 것이다. 생각을 생각으로, 실제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정신적 사건으로 관련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감정적인 고통의 덫에 걸리게 하는 생각-감정이라는 순환의 손아귀에서 마음과 몸을 해방시킬 수 있다.
--- p.205
무엇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능숙하고 즐거운 활동을 하는가, 즉 활동의 배후에 있는 마음 또는 의도가 보다 더 중요하다.
당신 자신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써, 최선을 다해 능숙하고 즐거운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보라.
기분이 저조하고, 진이 빠지고, 모든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져 버렸다고 느낄 때,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져라.
“바로 지금 나 자신을 어떻게 가장 잘 돌볼 수 있는가?”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