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이넘은 자신이 먼로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십대에 먼로의 영화를 보다가 너무 유약한 그녀의 모습에 참을 수 없어 그만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30년도 더 지난 후에는 그런 유약함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로가 어려서 맞고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맞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매맞는 여성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먼로는 어린 시절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따라서 1950년대 문화에서는 거기서 탈출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타이넘은 다음 책에서는 그런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제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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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는 또 《미즈》 전화번호를 섹스 서비스하는 곳의 전화번호라고 실어, 전화 교환대에 있던 젊은 여성을 완전히 기절 초풍하게 만들었는가 하면, 이미 신문잡지 판매대의 진열대에 걸려 있던 그 커다란 화보를 포스터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스타이넘의 변호사 낸시 웩슬러가 《스크루》에 이 모든 것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자, 편집자 앨 골드스타인은 스타이넘에게 사탕 한 상자와 “그거나 먹어”라는 쪽지를 보냈다. 이것이 공인은 그런 상황에서 거의 기댈 데가 없다는 것을 스타이넘에게 가르쳐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다. 스타이넘이 『발칙한 행동』에서 자세히 말한 대로, “벨라 앱저그의 우스갯소리만이 날 그런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었다. 내가 벨라에게 내 얼굴과 머리를 한 그 누드 화보에 대해 설명하자,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음순은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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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의 역사에서 가장 속을 썩인 것은 《미즈》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잡지가 비판 받을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편집자들이 실수를 하지 않거나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미즈》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미즈》가 이런 잡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좌와 우의 열성적인 페미니스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먼저 NOW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노력과 이룬 성과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즈》를 비웃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설사 같은 원칙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애당초 좌파 출판물과는 다른 호화로운 대중잡지를 내기로 한 결정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 스타이넘을 주요 표적으로 삼은 이런 비판들은 주로 완전히 다른 잡지를 꿈꾸는 사람들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잡지 편집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미즈》에 글을 쓴 페미니스트 저술가 비비언 고닉은 1975년 《빌리지 보이스》에 쓴 기사에서 처음으로 비판의 무익함을 인정한 비판자였다. 그녀는 “글로리아와 《미즈》는 적이 아니다. 적은 성차별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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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스타이넘에게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녀가 남성이 움직이는 제도를 통해 일하려고 한 것은 그때가 거의 마지막이었다. 《뉴욕》이 창간되자 스타이넘은 1차 투표에서 험프리가 이기는 걸 막고, 조지 맥거번을 평화를 위한 후보로 내세우는 것이 유진 매카시에게 환멸을 느낀 대의원들을 확보하는 길임을 선전하고, 농장노동자들의 문건을 배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기 위해 시카고에 갔다.
그러나 4년 뒤 1972년에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그녀의 노력은 여성회의를 대변해 여성의 권리와 주장을 널리 알리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 1968년에 한 경험은 그녀가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것은 위계적인 남성의 제도를 통해 일하는 것은 여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타이넘은 베트남 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작가들을 조직해 그들의 개인소득세 일부가 혹시라도 전쟁을 지원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걸 막기 위해 그만큼 세금을 내지 않는 운동을 벌일 때도 주된 역할을 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세금 안 내기 운동은 1967년에 시작되었는데, 1968년 2월에는 4백 명이 넘는 작가와 편집자들이 ‘전쟁세에 반대하는 작가와 편집자들의 항의’라는 광고에 서명해, 세금의 10퍼센트를 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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