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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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다 높고 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명교설숭(明敎契嵩, 1007~1072)
1
도보다 높고 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도덕이 간직되었다면 보통 사람이라 해도 곤궁하지 않으며, 도덕이 없다면 천하에 왕 노릇을 한다 해도 되는 일이 없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절개를 지키느라 굶어 죽은 옛날 사람이지만 지금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그에게 비교하여 주면 모두가 기뻐한다. 한편 걸(桀)?주(紂)??)는 옛날의 임금이었으나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를 그에게 비교하면 모두가 화를 낸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납자는 도덕이 자신에게 충만하지 못한 것을 근심할지언정, 세력과 지위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심진집(津集)』
2
부처 되는 공부는 하루아침에 완전해지지 않는다. 낮으로 부족하면 밤까지 이어가며 오랜 세월이 지나야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그 때문에 “배움으로써 뭇 이치를 모으고 질문으로 그것을 분별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공부를 할 때 질문과 변론이 아니면 이치를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요즈음 납자들 중에는 어딜 가나 다른 사람에게 한마디 질문이나 변론을 꺼내는 사람이 드물다. 이들은 무엇으로 성품자리를 도와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려는지 모르겠다. 『구봉집(九峰集)』
3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맹자(孟子)』를 읽다가, 양혜왕(梁惠王)이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 대목에 이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덮어버리고 길게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슬프다. 이익이란 실로 혼란의 시초이다. 때문에 공부자(孔夫子)께서도 이익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는데, 이는 항상 그 근원을 막고자 함이었다.”근원이란 시초이다. 귀천을 막론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폐단은 다를 수 없다. 공직자가 이익을 챙기느라 공정하지 못하면 법이 문란해지고, 보통 사람이 속임수로 이익을 취한다면 일이 혼란해진다. 일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이 다투어 화평하지 못하고, 법이 문란해지면 대중이 원망하여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서로가 뒤틀려 싸우며 죽음도 돌아보지 않는 일이 이로부터 비롯하니, “이익은 실로 혼란의 시초이다.”라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성현께서 이익을 버리고 인의(仁義)를 무엇보다도 존중해야 한다고 깊이 주의를 주기까지 하셨는데도 후세에는 이익을 걸고 서로를 속이며 풍속을 해치고 가르침을 상하게 했던 자들이 한없이 많았다. 더구나 이익 취하는 방법을 공공연히 벌여놓고 자행하면서 세상 풍속을 올바르게 하여 야박하지 않게 하려 하나, 될 법이나 하겠는가. 『심진집(津集)』
4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에는 드러나는 것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다. 드러나지 않는 악은 사람을 해치며, 드러난 악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악은 작고, 사람을 해치는 악은 크다. 그러므로 잔치하는 가운데도 독주[毒]가 있고 담소하는 중에도 창[戈]이 숨겨져 있으며, 안방구석에도 호랑이와 표범이 있고 길거리에는 첩자가 있다. 스스로가 마음속에 악이 싹트기도 전에 끊어 버리는 성현이 아닌 다음에야 예의와 법도로써 미리 막아야 하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해로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서호광기(西湖廣記)』
5
대각회연(大覺懷璉, 1010~1090) 스님이 육왕산(育王山)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두 스님이 시주물 때문에 다툼이 그치지 않는데도 주사(主事)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스님이 불러서 오라 하고는 그들을 꾸짖었다.
“옛날에 포공(包公)이 개봉(開封) 지방의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그 동네 어떤 사람이 와서 ‘백금(白金) 백 냥을 저에게 맡겨둔 사람이 있었는데 죽어 버렸습니다. 지금 그 집안에 되돌려 주었으나 그 아들이 받질 않으니, 공께서는 그 아들을 불러 되돌려 주십시오.’ 하였다. 공은 기특하다고 칭찬하며 즉시 그의 아들을 불러 말하자, 그는 사양하며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백금을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집에 맡겨둔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굳이 사양하자, 공께서는 부득이 성내에 있는 사찰에 부탁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 천도하라 하였다.
나는 그 일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번뇌 속에 사는 속인도 재물을 멀리하고 의로움 사모하기를 그토록 하는데, 너희들은 부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다지도 염치를 모르는가.”
그러고는 결국 총림의 법규에 따라 쫓아내 버렸다. 『서호광기(西湖廣記)』
주
:
1 명교설숭(明敎契嵩) : 운문종. 동산효총(洞山曉聰, ?~1030)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청원의 17세 법손이다. 세간에 나온 책은 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원교론(原敎論)』을 지어 유교와 불교를 하나로 통하게 하여 한유(韓愈, 768~824)의 배불설(排佛說)에 대항하였다. 항주(抗州) 불일사(佛日寺)에 머물렀다.
2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서쪽 변방에 살았으며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훗날 서주 문왕이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을 때에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3 중국 고대 하나라의 걸왕, 은나라의 주왕, 주나라의 유왕과 여왕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인 폭군으로 유명하다. 『묵자(墨子)』의 「천지지(天地志)」에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모두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득을 주어서 반드시 상을 받게 되고,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각자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 해를 끼쳐서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걸왕, 주왕, 유왕, 여왕이 바로 하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이어서 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4 『심진문집(津文集)』 권7 「도덕(道德)」(T52-680c).
5 『심진문집(津文集)』 : 명교대사(明敎大師) 설숭(契嵩)이 지은 문집. 설숭이 호남성(湖南省) 심진에서 태어났다 하여 책이름을 ‘심진’으로 하였다.
6 “學以聚之(학이취지) 問以辨之(문이변지)” 『주역(周易)』 「건괘(乾卦)」 92. 흔히 ‘학문’이라는 말의 유래가 이 문장이라고 한다.
7 북송의 구봉감소(九峰鑒韶)의 문집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어떤 문헌인지 분명하지 않다.
8 『맹자집주(孟子集注)』 권1,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제1장.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뵈었더니, 혜왕이 말하길 ‘장로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맹자가 대답하길, ‘왕께서는 어찌 구태여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9 『사기(史記)』 「열전(列傳)」 14 ‘맹자(孟子)?순경(荀卿)’ “내가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때마다 양혜왕(梁惠王)이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이로움이란 진실로 어지러운 것의 시작이구나! 무릇 공자(孔子)가 이로움에 대해 드물게 말한 것은 항상 그 근원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로운 것에 따라 행동하면 남의 원망을 많이 받는다고 하였다.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로움을 좋아해서 생긴 병폐가 어찌 다르다고 하겠는가?’”
10 『심진문집(津文集)』 권6 「선악(善惡)」(T52-676c).
11 선원에서 감원(監院, 선원 주지를 보좌하여 서무 일체를 맡은 소임)?유나(維那, 선원 대중의 감독 소임)??직세(直歲, 사찰의 건물과 토지 등을 관리하는 소임)의 네 지사(知事)를 주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맥락상 대중을 감독하는 ‘유나’를 가리킨다.
12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 개봉현(開封縣).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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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피하여 절개를 지키다
원통거눌(圓通居訥, 1009~1071)
1
대각회연(大覺懷璉, 1010~1090) 스님이 과거 여산(廬山)에 갔을 때 원통거눌(圓通居訥) 스님이 한 번 보고 바로 대기(大器)라고 확신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줄을 아셨습니까?” 하고 묻자, 거눌스님은 말하였다.
“이 스님은 마음이 정대(正大)하여 치우치지 않고 모든 행동이 고상합니다. 더욱이 도학(道學)을 이루어 의로움을 실천하며, 말은 간단하나 이치를 극진히 하니, 일반적으로 타고난 품격이 그러하고도 그릇을 이루지 않는 이는 드뭅니다.” 『구봉집(九峰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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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황우(皇祐) 초년(1049)에 조정에서 환관을 파견하고 비단에 조서를 적어서 거눌스님을 큰 절인 효자사(孝慈寺)에 머무르도록 청하였다. 거눌스님은 병을 핑계로 일어나지 않고 소문(疏文)을 올려 대각회연 스님을 추천하는 것으로 조정의 부름에 응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성스러운 천자께서 도덕을 높이 드러내시어, 그 은혜가 샘물이나 돌에게까지도 미쳤습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사양하시는지요?”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외람되게도 승려의 무리에 끼어들긴 하였으나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요행히 숲 속에 안주하여 거친 밥을 먹고 흐르는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비록 불조(佛祖)의 경지라 해도 하지 않으신 일이 있는데 그러하지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선철(先哲)도 ‘이름난 큰 인물 아래에서는 오래 있기 어렵다.’고 하셨으니 나는 평생을 자족할 줄 아는 뜻을 실천할 뿐, 명성과 이익으로 자신을 얽어매지는 않겠습니다. 마음이 넉넉하다면 언제인들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동파(東坡)도 언젠가 말하기를, “편안한 줄 알면 영화롭고, 만족한 줄 알면 부자다.”라고 하였다. 원통스님은 명예를 피하여 절개를 지키고, 훌륭하게 시작하여 훌륭하게 마치는 일을 체득했다 하겠다. 『행실(行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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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저는 사람의 생명은 지팡이에 있으니 지팡이를 잃으면 넘어지고, 물을 건너는 사람의 운명은 배에 있으므로 배를 잃으면 익사한다. 대개 스스로 도를 지키지 않고 외부의 세력을 믿고 이를 대단하게 여기는 수행자는 하루아침에 그가 기대고 있던 배경을 잃으면 모두가 넘어지고 빠져죽는 난리를 면치 못한다. 『여산야록(廬山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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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백장대지(百丈大智, 720~814) 스님께서는 총림(叢林)을 세우고 법도를 정하셨다. 이는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시대의 바르지 못한 폐단을 고쳐 보고자 했을 뿐, 상법과 말법시대의 납자가 법도를 도적질하여 백장의 총림을 무너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스님들이 둥우리나 바위굴에 살면서도 사람마다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대지스님 후로는 높고 널찍한 집에 살면서도 사람마다 스스로를 피폐시켰다. 그러므로 “안위(安危)는 덕에 달렸으며, 흥망은 운수에 달렸다.”고 한 것이다.
실로 받들어 행할 만한 덕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총림이 필요하겠으며, 기댈 만한 운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법도를 사용하겠는가? 『야록(野錄)』
5
원통스님이 대각스님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은 싹트기 전에 마음을 다스렸고, 혼란해지기 전에 미혹한 마음[情念]을 막았으니, 미리 대비하면 뒤탈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중으로 문을 잠그고 목탁을 치면서 도둑에 대비하였는데, 이는 『주역(周易)』의 예괘(豫卦)에서 원리를 취한 것입니다. 일은 미리 하면 쉽고 갑자기 하면 어렵습니다. 훌륭한 분[賢哲]들에게 평생의 근심은 있었을지언정 하루아침의 근심이 없었던 이유가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봉집(九峰集)』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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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통거눌(圓通居訥) : 운문종. 연경자영(延慶子榮)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청원의 10세 법손이다. 11세에 출가하여 17세에 『법화경(法華經)』을 읽고 득도한 후 여러 지방을 다니며 참학하였다. 후에 원통사(圓通寺)에 머물렀다.
2 북송의 제4대 황제 인종(仁宗, 1010~1063, 재위 1022~1063).
3 “大名之下(대명지하) 難以久居(난이구거)”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 월나라의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운 후에 떠난 범려(范)가 한 말.
4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
5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전(下傳) 제2장.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