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 순천명이라 하셨나이까? 하면 무엇이 순천명이란 말씀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탁발승이 염주를 돌리며 보무도 당당하게 멍석말이를 당할 참인 중늙은이에게로 걸어왔다. 워낙 굳센 모습이라 보국조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길을 터주었다. 윤원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저, 저 땡추는 누구야?”
탁발승을 바라보는 양기홍의 미간이 구겨졌다. 누군지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탁발승이 윤원형을 한번 째리곤 양기홍에겐 가볍게 목례해 주었다. 그러나 양기홍은 모른 척 잠자코 있었다.
“봉은사에 적을 둔 땡추올시다, 대감.”
“뭐, 뭐야?”
윤원형 면전이지만 탁발승은 거침없이 굴었다. 멍석을 걷어버리고 중늙은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코에서 피가 터져 피범벅이 된 중늙은이는 실신 지경인데도 죽여라, 죽여 하며 쥐어짜내듯 간신히 말하고 있었다. 탁발승이 중늙은이의 앙상한 어깨를 가벼이 토닥댔다. 윤원형이 펄쩍 뛰었다.
“네 이놈, 아무리 봉은사의 중놈이라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놈은 응징받아 마땅하다! 아니면 네놈도 멍석말이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무엇이 순천명이냐고 이 땡추가 물었지요?”
“뭐야?”
“주지육림에 빠지신 대감이라 하더라도 글은 읽으셨겠지요?”
“저저, 저놈 말하는 꼬락서니가…….”
“이 땡추가 글이 짧아 잘은 모르겠으되, 순천명이란 천명에 순응한다는 뜻이 아닌지요? 하면 천명이란 어디서 오는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땡추가 겨우 읽은 책이 하나 있다면 시경인데, 거기서 가로되 천명이란 덕이 있는 사람에게 간다고 하더이다.”
심의겸은 거리낌 없이 얘기해 나갔다. 구린 데는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이지함을 지그시 응시하는 눈빛 또한 강렬했다. 이지함 역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 같으면 끼어들려고 법석을 떨었을 테지만 명석은 잠자코 두 사람만 번갈아 보았다.
“양재역 벽서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때 이후부터 윤원형 대감이 조정의 실세가 되었는데, 아무리 참의 나리의 조부라 하더라도 내놓고 이 집에서 키울 수야 없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괜한 오해를 사서 윤 대감과 척질 필요야 없는 일이지요. 하여 조부께서는 왕실의 종친 쪽에 은밀히 맡겼었지요.”
“허어, 그렇게까지요?”
“당시 유생들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까? 특히 계월이의 부친은 한때 우리 집의 식객 노릇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전도가 양양한 유학자라며 내 조부께선 특히 주목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의 핏줄이니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씀이군요. 하해와 같은 인망이십니다.”
“선대왕 후궁이신 숙의 이씨의 아드님 덕양군께서 그 아이를 열둘 살 때까지 보살폈다고 합니다. 이후 여기서 자라게 되었답니다. 조부의 소망이야 걔가 잘 커서 여염집이나마 시집을 가는 걸 보려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계월이가 스스로 기생이 되겠다고 나서는 통에…….”
이 대목에서 심의겸의 표정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착잡한 심경을 굳이 감추지 않은 셈이다.
“스스로?”
“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어요. 속이 깊은 아이인데다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
나직이 대꾸하는 심의겸의 눈빛 또한 처연했는데, 명석이 전에 없이 코를 훌쩍였다. 그제야 기생집에 들락거렸던 그의 처신을 이해한다는 듯 명석은 양손을 깍지 끼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고개도 크게 끄덕거렸다. 아니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요즘 같은 세상에서 보기 힘든 큰 미덕으로 여겼던지 감동해 하는 모양이었다.
이지함만 여전히 탐색하는 듯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동생처럼 생각하셨나 봅니다.”
“예, 굳센 아이였지요. 절대로 자살에 동의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치정에 의해 승려가 살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호사가들이야 동반자살 운운하는 게 더 구미가 당기는 소재겠지만 포청은 분명히 승려가 척살한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현장에 가보시거나 시신들을 검안하시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좀 전 두 사람의 죽음에 타살의 물증 운운하셨는지요? 그건, 승려의 죽음 또한 자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표현이 아닙니까?”
“예?”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