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와 처음 관계한 다음 날, 은하는 눈이 몹시 어지러워서 하루 종일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클림트와 고흐의 그림을 보았다. 안개가 약간 걷힌 듯, 그녀는 고흐의 노란빛에서는 거친 슬픔을, 클림트의 황금색에서는 황홀한 쾌락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아주 조금 맛만 본 것처럼 뚜렷하게 와 닿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빌려준 망원경을 다룰 줄도 모르고 잠깐 엿보고 바로 빼앗긴 느낌이었다. 준호는 누군가와 자고 싶은데 딱히 잘 여자가 없을 때에만 은하에게 연락했다. 은하는 그때마다 지체 없이 달려왔다. 한번은 준호가 유혹했던 다른 여자를 불렀는데 그녀가 오지 않아서 은하를 불렀던 일도 있었다. 은하가 오고 나서야 그 여자가 오자, 준호는 넉살 좋게 셋이서 하자고 느물댔다. 다른 여자가 기분이 상해서 가버리자, 그제야 준호는 은하를 안았다. 은하는 스스로 자학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준호가 어떤 모욕을 주던, 은하는 그의 옆에 있기 위해 반발하지 않았다. --- p.49 〈등가교환〉에서
은하 차례가 오자, 무당은 짐짓 은하를 잠시 노려보더니 말했다. “다른 사람의 수호신을 가졌구나!” 은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우성호는 〈식스센스〉의 반전 장면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은하를 쳐다보았다. 우성호의 아내는 문을 모르고 무당과 은하 얼굴을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아 놀랄 것 없어! 수호신은 누구나 다 있으니까. 그중 수호신과 몸이 통하는 사람이 나처럼 무당이 되는 거지. 수호신이 옮겨가는 거, 흔치 않은 일이긴 한데 가끔은 있어. 자네가 가진 수호신의 능력은…… 이미 자네도 알고 있군. 근데 수호신이 아무리 괜찮아도 그릇이 별로면 능력 발휘를 못하거든. 이전 사람 그릇이 별로라서 자네한테 옮겨왔어.” “왜 제가…… 갖게 된 거죠?” 은하는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란 게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90 〈수호신〉에서
사람들은 〈TV쇼 진퉁짝퉁〉에서 진품을 알아내는 적중률이 백 퍼센트에 달하는 은하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항간에는 짜고 하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인간이라면 전문가도 아닌데 저 정도로 정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하는 그 눈을 이용해 도깨비시장 같은데서 고물 중에 골동품을 찾아내서 인사동에 골동품을 파는 일을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었다. 골동품 가게들에선 이미 유명했고, 골동품 가게 주인들의 인터뷰도 있었다. 거기다 은하가 모든 진품을 다 골라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골라낸 것은 반드시 진품이었고, 그녀가 골라내지 못하는 진품도 있었다. 거기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그것은 우표나 동전, 특정 시대의 생산품 등 만듦새나 만든 이가 뛰어나다기보단 시대적 가치 때문에 비싼 값이 매겨지는 종류의 골동품들이었는데, 그녀는 그런 것들은 골라내지 못했다. 결국 은하가 진짜로 자신의 능력으로 진품을 가려내는 것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굳혀져갔다. --- p.102-103 〈재회〉에서
은하는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은성은 그런 은하를 힘으로 쳐내고 무겁게 말했다. “취했어. 난 이만 가볼게.” 하지만 은하는 다시 은성을 껴안으며 말했다. “오늘 그냥, 나랑 자면 안 돼? 별 거 아냐, 그냥 즐기면 돼. 아무 부담도 주지 않을게.” 은성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은하를 자신의 몸에서 거칠게 떼어내 강제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등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갔다. 은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날 창녀라고 생각해!”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말에, 은성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디서 들어 본 말이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임수정의 대사다. 똥을 싸고 방귀를 껴도 한없이 예쁘기만 했던 그녀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의 첫 마디라고 말하며 류승룡의 심장을 덜컹 내려않게 했던 대사. --- p.276 〈그들이 말하는 금성〉에서
은하는 이 넓은 우주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비참한 외로움을 느꼈다. 한동안 그녀는 작업실에 조용히 칩거했다. 그날, 은하의 작업실 건물에 정전이 일어났다. 마침 집에 촛불이 있어서 은하는 촛불을 찾아 켰다. 촛불의 그 불꽃이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은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더 큰 불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베란다로 가서, 베란다 타일 종이 위에 불을 붙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옛날 금성의 그림을 처음 보고 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처럼 은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다. 은하는 불꽃이 꺼지지 않게 자꾸자꾸 종이를 넣었다. 더, 더, 더. 바람이 휘리릭 불어 베란다 커튼이 나부끼면서, 불꽃의 일부가 베란다 커튼에 옮겨붙었다. 불꽃이 더 커지자 그것은 더 큰 환희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은하의 눈 속에 비춰졌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하룻밤을 위해선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만리장성을 쌓으러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전설 속의 남자만큼이나, 은하는 이 불꽃의 아름다움을 계속 음미하기 위해선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p.305 〈반짝이지 않는 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