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러한 이해――즉 문화현상으로서의 과학의 성격·본질·역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가 그 특유의 도움 을 줄 수가 있다. 역사 속에 나타나는 과학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 특히 과학이 현대사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된 과정에 대한 이해는 현대사회에서의 과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1940, 50년대에 태동해서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학문적으로 성숙한 과학사 분야는 이런 면에서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 책에 모은 글들은 바로 이런 업적들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관심으로 추린 글들이다.
이렇게 해서 추린 12편의 글을 대체로 시대를 기준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개개의 글들에 대해서는 그 서두에 각기 간단 한 소개를 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세 부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얘기를 하겠다.우선 제1부는 전통사회의 과학에 대해서 다루 는 세 편의 글로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 서양 중세,그리고 중국의 전통문화에서의 과학의 성격·위치·역할 등에 대해서 비교 적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들이다. 이 글들로부터 우리는 이들 전통문화 속에서 과학이 지녔던 위치나 역할이 오늘날과 판이 하게 달랐음을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이들 문화에서의 과학의 성격도 아주 달랐음을 보게 된다. 특히 세번째 글은 중국 전통문 화의 여러 요소들이 그 속의 과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서양과 어떻게 다른 형태로 나타났나에 관한 비교연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제2부는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근대 과학의 성립의 사상적·사회적 배경을 살피는 다섯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앞의 네 편은 과학혁명기에 널리 퍼져 있던 경향인들 헤르메티씨즘(Hermeticism), 실용주의적 경향,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배경에서 근대 과학의 여러 측면을 조명해보고 있고, 마지막 글은 과학혁명이라는 현상을 여러 분야들로 이루어진 과학의 구조면에서 다시 살펴보고 있다.이렇게 다섯 편을 고르고 나니 근대 과학혁명의 핵심이 되는 사상적 조류인 기 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에 대한 글이 빠지게 되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썩 마땅한 글이 없을 뿐 아니라 흔히 과학 혁명을 기계적 철학과 이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투쟁, 그리고 그 결과로서 생기게 된 전자에 의한 후자의 대체로서 지나치게 단순 히 이해하는 것을 탈피한다는 의미에서도 이같은 누락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제3부는 `과학과 근대사회`라고 제목을 붙였고, 과학혁명의 결과로 형성된 근대과학과 사회의 다른 요소와의 관계 몇 가지를 살 피는 네 편의 글로 꾸며보았다. 첫째 글은 과학과 기술과의 관계, 두번째 글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급진적인 정치풍토 속에서의 과학의 위치와 역할, 세번째 글은 19세기 전반의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지적·기술적 조류가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과학 적 법칙의 동시발견에 기여하는 형태, 네번째 글은 20세기 초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독특한 문화적 분위기가 고전물리학의 붕괴 와 현대물리학의 성립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각각 다루고 있다. 이 글들은 특히 과학이 사회 내에서 점점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 고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점점 깊은 연관을 맺게 되는 과정을 예시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 속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엮어본 이 책은 직접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 문제의 해결 은 결국은 과학자들과 일반 지식인들 쌍방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선 과학자들은 그들의 분야가 인간사회의 윤리나 가 치관 같은 것에는 초연한, 완전히 격리된 세계에 관해 다룬다는 착각을 버려야 하며, 과학도 인간의 창조적 문화활동의 일부분이 고 따라서 전체 인류문화의 일부분, 그것도 현대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며 그에 따라 인간사회의 여러 요소에 영향을 끼 치고 영향을 받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사회의 일반인들이 그들의 분야를 이해하거나 말거나, 관심을 갖 거나 말거나에 초연한 채 지낼 수는 없으며 일반 지식인들에게 자신들의 분야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편 일반 지식인들도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가지는 중요한 위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하고, 어렵더라도 그 내용을, 특히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와 결부된 분야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과학의 전문화 때문에 그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서는 일반 지식인들에 의한 과학지식의 이해가 전혀 불가능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분 야에 있어 노력에 따라서는 훌륭한 초보적 지식을 얻어낼 수도 있다. 또한 과학지식의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일반 지식인 이 과학지식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접하게 되는 문제는 전문적인 과학지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의 사 용이 가져오는 이점들 중에서의 선택이거나 그런 이점을 위해 사회가 과학활동에 제공해야 할 투자·지원 등에 관한 문제이고,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과학내용상의 지식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과학지식의 일반적 성격, 과학활동의 특징, 과학활동과 사회의 여러 요소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한 이해는 과학의 내용에 대한 이해와는 달라서 그 전문화로부터의 어려움이 훨씬 덜하며, 일단 과학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를 이해하려고 나서기만 하면 충분 히 얻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