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짓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는 여자애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어. 사실 친구 녀석들이 늘 여자 얘기만 하는 건 아니었고, 다들 자기 공부로 바빠 그럴 수 없기도 했지만, 나는 가만있으면 있을수록 내 자신이 투명해지는 것 같아 무서웠어. 부지런히 거짓말을 하고, 과장되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내 모든 관심사가 여자에게 있는 양 가식을 떨다보면 나도 내 정체를 모를 정도로 뿌옇게 흐려져서 안심이 됐지. 내가 어떤 놈인지 나 자신도 모른다면 남들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 영원히 그렇게 희뿌연 존재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 --- p.13 중에서
엄마가 날 위해 골라준 것들은 언제나 지극히 평범했어. 평범한 셔츠, 평범한 바지, 평범한 양말, 평범한 가방, 평범한 연필, 평범한 자전거 등등…….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의 성을 가진 아이치고는 꽤나 평범했고 앞으로도 평범하게 살게 될 거라 굳게 믿었었어. 하지만 나는 아빠가 없는 것 정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튀게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던 거야. 다른 문제야 다 접어둔다 해도, ‘동성애자’라는 건 그야말로 엄청나게 튀게 돼 있는 거잖아. 엄마는 꽤 용감하고 씩씩한 여자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 나는 엄마를 실망시키게 될까봐 정말 두려웠어. 사는 게 뜻대로 안 된가는 거 엄마도 알고 있어. 아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아들도 그렇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인가? 나는 튀지 않기 위해 언제까지나 팔을 휘적거리며 멋진 여자친구라도 있는 양 해야 되나? -- p.27~28 중에서
아무리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이라도, 그래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다가도, 그들은 자신이 정말로 절망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면서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해, 내일도 기대하고 있어, 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보여주기도 하는 거야. 그 일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대개의 사람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주의자라는 사실. 그러니 동성에게 끌린다는 사실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나도 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주의자일 가능성이 높을 테고, 그러므로 지금처럼 힘들거나 답답하거나 우울해질 때라도 그 감정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나도 내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에게는, 대책이 없을 정도로 희망에 넘쳐 있어 약간 바보스럽지만 그래도 따듯하게 바라보아지는 그런 사람일 테니까 말이야. 안 그래, 비너스? --- p.37 중에서
나는 뭐에라도 홀린 듯 이야기들에 빠져들었어. 아마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온갖 고통스러운 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적어도 나는 그랬어. --- p.41 중에서
내 주변엔 게이라고는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어서 이게 내 개인적인 특성인지, 아니면 성적 기호에 따르는 일반적인 특성인지 가늠이 되지를 않았어. 하지만 이런 생각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어, 비너스. 내 취향이나 관심사 모두가 단지 성적 기호에 따라붙는 특징적인 행태 중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건 말이야. 그건 마치 “저기 물소 떼가 보이십니까. 그들은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일단 원을 그리며 울타리를 만들고 새끼들을 보호합니다”와 같은 '동물의 왕국'에서나 들을 법한 설명이잖아? 내가 물소 떼 속의 물소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를 몹시 착잡하게 한 거지. 하아…… 나는 그냥 나면 안 되는 건가? -- p.42~43 중에서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본모습은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야. 자연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거든. 단지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없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야.“ --- p.46 중에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는 곳에 모서리가 있어서, 그 모양이 어떤지를 혼자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자신에게 꼭 맞는 누군가와 만나게 되면 철컥, 소리와 함께 그 모서리 부분이 단단히 맞물리게 돼. 상대방의 모서리 모양을 보면서 내 모양이 어떤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거, 그게 바로 사랑 같았어. 군을 보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한 사람의 외면과 내면 모두가 내게 그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어. --- p.50 중에서
나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툭탁거리고, 지루한 수업도 견뎌가며 어딜 가든 내 이름과 함께하는 ‘A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문장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 나는 정말 낙오자가 된 거였고, 그게 바로 첫 키스 때문이라는 건 웃어넘길 수도 없는 악질적인 농담 같았어. 거짓말로 시작된 설문을 위해 쉬는 시간을 몽땅 바쳤던 일들이? 군에게 잘보이고 싶어했던 모든 과장된 말과 행동들, 군에게 가졌던 터무니없는 기대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내게는 ‘수치’ 그 이상은 아닐 첫 키스의 당혹스럽고 황망한 기억. 도대체 어디쯤에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어. -- p.70~71 중에서
비너스. 어른이 된다는 건 멋지고 완벽한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양나 씨처럼 불완전한 사랑에 담담해진다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이 고통이나 자책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게 아니라, 단지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뿐인가? 이 순간의 아픔이 영원히 남게 되는 거냐고 양나 씨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어. 내 질문에 양나 씨가 “그래, 소년. 불행히도 우리가 한 번 겪은 시간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버려”라고 답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거든. -- p.93 중에서
나는 내가 만일 이성애자였다면, 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 않아. 가정은 가정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 처음 생각해보았어. 이성애자였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길고 지루하며 복잡한 과정을 통해 결합하는 법적인 관계를 만들고, 또다시 그러한 과정을 겪어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결혼제도를 만들어낸 건 어차피 사람 모두가 가볍고 무성의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 p.104~105 중에서
비너스. 나는 현신의 부드러운 음성에서 어떤 멜로디를 들을 수 있어. 그건 무척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우며 순수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 어쩌면 나는 다시 사랑에 빠지고 있는 건지도 몰라. 참 이상한 일이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만일 내가 현신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면 아마도 군에 대한 사랑과는 완전히 다를 거야.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거고,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할 테니까. -- p.130~131 중에서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상처를 끊임없이 받는 수밖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그 말은 우리가 모르는 시간 안에도 이미 지나온 시간 안에서처럼 무수한 상처들이 숨겨져 있고, 그 시간을 통과하려면 상처 역시 필연적으로 겪어낼 수밖에 없다는 뜻. 두렵고 무섭지만, 고통이 뭔지를 알게 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 p.17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