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에게는 어떤 일에도 경계가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삶과 취미 생활의 경계 역시 그러하다. 모호하다. 그러니까 이들, 다른 사람들이 취미로 할 만한 일들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광원: 남들이 갖지 않은 대단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로 밥벌이를 하는 건 아니에요. 나에게 있어 굳이 취미라면, 영화나 책을 보거나 멍 때리며 커피를 마시며 일광욕을 하는 정도인데 사실 그걸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 시간들이 커피를 내리거나 집 수리 따위의 일을 하는 데 영감을 주거든요. 요즘은 시간이 날 때면 주로 가게에서 필요한 가구나 소품을 만들어요. 제주에서의 생활이 유독 그런 점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부분도 있어요. 우리에게는 그저 습관적인 자급자족적 삶일 뿐인데, 다른 이들의 시선에 의해 포장되는 부분도 적지 않아요.
우리 둘의 취미는 확연히 달라서 뭐 하나 공유할 만한 게 없어요. 아내의 오컬트 취미에 대해서 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지극히 현실적이지요. 둘 다 취미와 일의 구분이 별로 없어요. 좀 더 정확하게는 그런 프레임으로 세상 보는 법을 잘 모른다고 할까요. 시기적으로 필요한 것이 생기면 만들거나 구하고, 해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해요. 그게 돈을 버는 일이 되기도 하고요. 노는 일, 쉬는 일, 돈 버는 일 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어요. 가끔 평일 오전에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해요. 그게 둘이 함께하는 유일한 취미일 걸요. --- p.24
현명 농부는 과거 규모 있는 의류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했다. 그러다가 여행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인생이 좀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늦가을 멍하니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장애인 원예 치료를 하는 영국 어느 원예치료농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씨앗으로 식물을 키우는 장애인들의 웃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단다. 그날 이후로 식물에 빠져들었는데, 날마다 씨앗을 뿌리고 떡잎이 올라오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식물
에 새잎이 돋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베란다에서 시작된 작은 원예 활동은 점점 확대되어 순식간에 100평 정도의 땅에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가 되었다. 집도 아파트에서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삶이 하나씩 바뀌어 갔다. 현명 농부는 아침에 눈을 뜨면 밭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풍경과 일들이 마냥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농사라는 취미는 곧 깊어지고 깊어져서 많은 일들에 다양하게 관심을 기울이며 사는 그녀에게 있어 1번의 직업이 되었다. --- p.82
물건들을 바라보는 정아 씨의 뜨거운 시선 때문일지 모르겠다. 연희동에 달빛 별빛이 사이좋게 내려앉는 밤이면 그 가게의 물건들이 서로의 여행기를 풀어놓으며 진열대 위를 뛰어다닐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밤을 꼴딱 지새우고 가게 셔터가 올라가기 직전까지.
경정아: 예전에 제가 특별히 아끼는 무민 캐릭터 소품이 있었어요. 양철로 만든 약 보관함 같은 것이었는데, 외국에서 그걸 사 올 때도 단 두 개뿐이라 아쉬워했거든요. 그런데 매장에 내놓자마자 손님 한 분이 너무 예쁘다며 사 갔어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죠.
안기형: 아내는 그 틴케이스가 하나 남은 것을 보더니 자기 지갑을 열더라고요. 마음이 급했는지……. 아내의 감성은 이 가게와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가끔 그렇게 아내가 저에게 물건을 삽니다. --- p.107
이후의 시골살이는 잘 만들어진 잡지의 한 꼭지 기사처럼 궁금증이 솟는 매력이 있다. 서른여섯 이른 봄에 사표를 내고 처음 내려간 곳은 경남 하동. 몇 달 동안 지내면서 차를 따고 텃밭을 일구며 실컷 놀았는데, 어느 날 문득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부모님 계시고 친구들이 있는 서울과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올라가야지 마음먹고 옮긴 곳이 충청도 보은. 그런데 또 어찌어찌하여 보은에서 괴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거기에서 한 남자를 만나 같이 이사한 곳이 지금의 무주군 무풍면이다. 내가 이후를 만났을 때 그녀는 무풍상회茂豊相會의 주인장이었다. 무풍에 있는 상회라는 뜻인데, ‘상’은 ‘장사 상商’이 아니라 ‘서로 상相’ 자이다. --- p.181
그야말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 이런 사람 보면 보통 하는 질문이 있지 않던가. 상투적이지만 꼭 긍정의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 세상이 즐거웠으면 하는 사람들이 청각을 자극하는 그 질문.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도 있는 거지요? 지금 그거, 독립출판이라는 거요.” 지금 이 책장에 시선을 둔 당신, 어떤 답을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책이 마냥 좋은 나는 지금의 어렵다는 출판 사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어 왔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살 만하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문 작가는 가차 없이 내 기대를 저버리고 사실을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그걸로 먹고 살만한가요?’ 하는 질문은 들을 때마다 서글퍼진다고.
---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