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떨어진 개암 껍데기와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훈장이나 메달도 없이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승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이 소용돌이를 헤쳐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인 나 자신을 재발견했으니까 말이다. --- p.9
2년 가까이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이 이룩한 진정한 민주주의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동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정직한 척하는 사람들이 만든 가짜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행히도 그들 중 몇몇은 예전처럼 그렇게 정직하지 못하다. 인간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산물이니까. 무엇보다도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다시 느낄 수 있게끔 말이다. --- p.12
우리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민주주의 도시를 건설했다. 수용소에서 지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 하루하루의 삶 앞에 당혹해하며 세상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건 수용소 시절 그들이 이룩했던 민주주의와 지금의 가짜 민주주의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음모의 진원지인 그 가짜 민주주의에서는, 늙고 젊은 해적들이 어울려 키를 잡고 해적선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런 민주주의에 실망한 이들은 아마도 수용소 생활을 한 우리들 중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일 것이다. 가짜 민주주의에 실망한 이들에게, 그리고 가짜 민주주의에서 위로를 받은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p.15
어딜 바라봐도, 신의 눈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를 지켜보는 감시탑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그들과 함께 있으며, 우리의 신과는 아주 다르다고. 그리고 비밀스럽고 기괴한 이름, ‘고트Gott’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 p.50
이보쇼, 독일 제국 양반, 당신은 나를 철조망 안에 가둬놓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소.
허나 다 쓸데없는 짓이라오. 난 도망가지 않을 거요. 내가 원하는 것들은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으니까 말이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내 추억들도. 그뿐만이 아니라오. 자애로우신 하느님도 들어오셔서 당신의 규칙이 금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주신다오. --- p.56
우리에게는 오직 꿈꾸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다. 꿈을 꾸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철조망 안에 있고, 그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직 꿈뿐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는 꿈속에서라도 현실에 매달려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면 말이다. 최소한의 음식과 담배꽁초로 이루어진 비참하고 의미 없는 이런 날들 속에서 유일하게 활동적이고,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꿈일 것이다.
꿈을 꾸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 p.67
이탈리아 군인이 죽으면 그의 시체는 땅에 묻히지만 그의 군복에 달려 있던 별 장식은 떼어져 하늘로 던져진다. 그러면 하늘에는 작은 보석 두 개가 더해진다. 이탈리아 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이유가 아마도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달고 있는 작은 별’은 단지 〈우리의 군인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가족, 내 아버지, 내 아이들, 내 형제들의 고통과 절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나는 이 별들을 내 몸의 일부처럼 사랑한다. 그리고 이 별들과 함께 나의 고향, 나의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 --- p.104
“가자. 우리 아빠를 보여줄게. 저 막사 안에서 주무시고 계셔.”
18번 막사 지붕 위로 세차게 불던 바람이 내 잠을 깨웠다. 나는 알베르티노를 다시 만났고, 내 어린 딸 카를로타 양도 알게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날을, 하루하루가 지나가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 p.159
집에서 온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카를로타는 이빨이 네 개나 났어. 그리고 “싫어!”라는 말을 배웠어.〉
나 역시 “싫어!”라는 말을 배웠다. 하지만 그 말을 배우는 데는 세계대전이 필요했다. --- p.160
마지막으로 음식 부스러기와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치우고 나면, 직사각형의 식탁보는 순백의 모습을 차곡차곡 접는다. 그리고 선반의 향기로운 서랍과 그날의 스캔들을 놓고 수다를 떤다.
“수프 속에 껍질이 안 벗겨진 쌀알이 들어 있지 뭐야……!”
“어찌 그런 일이!” 서랍은 몸서리를 쳤다.
옛날 옛적에 식탁보가 살고 있었다. 그 시절 수프 속에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쌀알이 나온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빵을 빵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포도주를 포도주라고 부르지는 못할지라도) 이것도 다 수프를 수프라고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