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심리적(psychological) 창의성’과 ‘역사적(historical) 창의성’을 구분하는 것이다(줄여서 ‘P-창의성’과‘H-창의성’이라 하겠다). P-창의성은 자신에게 새롭고, 놀랍고, 귀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능력이다.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면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H-창의적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전에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pp.12-13
새로운 결합은 의도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자를 태양계에 비유하는 물리학자나 정치가를 흉측한 동물에 비유하는 칼럼니스트를 떠올려보라. 아니면 시나 시각예술에 등장하는 창조적 비유와 연상도 좋다. 위와 같이 색다른 결합을 만들어내거나 그것을 감상하고 즐기는 행위는 언제나 그 사람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폭넓은 지식과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p.14
창의성이 초인적이거나 성스러운 근원에서 솟아난다거나, 몇몇 특별한 천재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불가해한 현상이라면, 컴퓨터를 통해 창의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엉뚱한 짓이다. 비단 ‘반(反)과학적’인 영감 지상주의자들이나 낭만주의자들만이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쾨슬러처럼 심리학을 통해 창의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창의성과 관련된다는 주장을 거부한 경우가 많다.---p.40
마법이나 신성한 영감이 아니라면, 창의성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그래서 창의성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미 예전부터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한 결과물이 바로 창의성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수학자 아다마르는 “수학을 비롯해 어떤 분야에서든 새로운 발명이나 발견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의 조합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했다. 앞에서 보았듯 푸앵카레 역시 아다마르의 의견에 동의한다. 쾨슬러는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 사실이나 아이디어가 통합되면서 창의성이 발현되는 이연 현상을 통해 창의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설명했다.---p.84
한마디로 우리가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느끼는 놀라움은 단지 기존 아이디어들의 낯선 조합 때문이 아니라, 인간 정신에 내재된 암묵적 또는 명시적 생성 원리를 통해서는 생겨날 수 없다고 믿었던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뜻밖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화학, 시, 음악 등을 관장하는 두뇌 영역의 일상적인 인지처리 과정을 통해서라면,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는 단순히 생겨날 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 마법이 아니라면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떻게 떠오르는 것일까? 왜 어떤 아이디어는 다른 아이디어들보다 더 놀랍고 창의적인가? 창의적 활동이 단순한 조합이나 무관한 요소들 간의 이연 현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근본적 창의성은 과연 어떻게 해야 발현되는 것일까?---p.104
컴퓨터 프로그램은 이미 귀중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생산해냈다. 사람의 정신이 그것들을 생각해냈다면 이 아이디어들은 많은 이들의 존경, 심지어는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생화학의 특정 분야를 다루고 있는‘전문가 시스템’이라는 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훌륭한 연구 결과를 얻어 과학 전문지에 실렸고, 어떤 프로그램은 새로운 과학 특허에 밑바탕이 된 아이디어를 생산해냈으며, 참신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전 세계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창의적으로 보일 수 있느냐는 러브레이스 두 번째 질문에 반드시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질문은 사실상 컴퓨터가 창의성을 모델화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p.254
이뿐만이 아니다. EURISKO는 ‘창의성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인간 참가자들을 제치고 우승한 적도 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대회는 주어진 예산으로 전함을 구축한 뒤 다른 참가자들의 전함과 싸우는 시뮬레이션 전쟁 게임이었다. 첫 참가에서 EURISKO가 설계한 전함은 너무나도 파격적이어서 다른 참가자들이 배꼽을 쥐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우승을 차지하자 그들의 웃음은 뚝 그치고 말았다. 이듬해 대회에서는 EURISKO에 불리하도록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두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 다음번에 또 한 번 규칙이 바뀌었다. 바로 ‘컴퓨터 참가 금지’였다.---pp.382-383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한 프로그램은 송유관을 통해 석유가 효닀적으로 이동하도록 조절하는 데 ‘만약 그렇다면’ 규칙을 사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석유의 유입과 유출량, 주입구 압력, 배출구 압력, 압력 변화 빙율, 계절, 시각, 날짜, 온도 같은 데이터를 매 시각 전송받았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이용해 주입구 압력을 조절하여 수요량 변화에 대응했다. 또한 송유관 안에 누출 지점이 있는지 추정하여 그에 따라 유입량을 조절하였다. 이 모두가 유입량을 조정하거나 누출을 감지하는 데 어떠한 규칙을 사용할지 프로그래머의 지시를 전혀 받지 않은 채였다. 프로그램 스스로 이러한 규칙을 발견한 것이다.---p.383
윌리엄 블레이크는 ‘로크의 베틀’과 ‘뉴턴의 물레방아’에 창의성과 자유, 주관성 같은 개념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 결과 수 세기에 걸쳐 과학계에서 정신의 중요성이 하찮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영감주의자와 낭만주의자들이 주장한 근거 없는 믿음이 우리 귀에는 훌륭한 음악처럼 곱게 들렸던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과학이 상상력에 대하여 입을 다무니 자연히 과학에 반대하는 노래가 빈 무대를 차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마침내 계산주의 심리학이 바로 그러한 것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경이나 자존감은 어떤 식으로도 약화시키지 않은 채로 말이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나 비범한지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을 더욱 증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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