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와 노새, 달의 있고 없음, 봉평에서 대화 방향과 강릉 방향…… 두 소설의 인용부 사이에서 차이를 찾자면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를 지워 버릴 정도로 큰 공통점이 양자에는 뚜렷하다. 나귀/노새의 방울 소리를 벗 삼아 밤길을 걷고 있는 ‘아비와 아들’, 그리고 그들의 밤길을 인도하고 있는 메밀꽃의 향훈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해 본다면, 말방울 소리와 메밀꽃 향기를 거느린 채 밤길을 가고 있는 ‘아비와 아들’을 이효석과 이순원이라 볼 수는 없을까. 그들이 걷고 있는 봉평의 밤길이란 곧 한국 문학상라는 호젓하고도 아름다운 꽃길인 셈이고. --- p.102, 〈메밀꽃 필 무렵, 아비와 아들은〉 중에서
왜 시인의 작의(作意)를 무시하고 작품을 제멋대로 이해하느냐고? 작품이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때부터 그 작품은 독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여기서 되풀이해야 할까? 작가의 애초 의도와 다른 방식의 작품 이해는 해당 작품을 왜곡하거나 망가뜨리기는커녕 더 새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법이다. 시인이 살아 있었더라도, 그처럼 변형되고 확장된 독법을 더욱 반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109, 〈나란히 앉아 한곳을 바라보다〉 중에서
박태원에서 주인석까지의 소설가 구보씨들은 물질적 현실에서 삼십 센티미터쯤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면모를 보인다.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 비친다. 그들이, 최인훈의 구보가 자탄하다시피, “삶에서 말을 배우는 게 아니라 말에서 삶을 배우”는 종류의 인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 무능과 패배로써 거꾸로 현실의 추악한 본질을 까발린다. 주인석 소설의 한 대목처럼 “소설은 좌절한 의식의 소산”이지만, 그 좌절은 반성과 저항으로 이어지는 적극적 좌절이다.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머릿속으로 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구보씨들은 적어도 그런 정도의 사회적 기여를 하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는 주인석 소설 속 구보 어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바로 ‘소설과 구보씨’들의 그런 역할 때문이 아니겠는가. --- p.133, 〈구보씨, 문학사를 거닐다〉 중에서
「제망매」와 「서유기」, 그리고 「찬 기 파랑」등 고종석의 ‘고전 삼부작’은 고전을 재해석하는 참신한 접근법을 보여준다. 특히 「찬 기 파랑」은 파천황의 상상력으로 패러디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은 또한 창조의 가능성이 고갈되고 온갖 지식과 정보가 해일처럼 난무하는 시대에 소설 작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기왕의 텍스트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가공하는 것만으로도 소설 쓰기는 가능하다는 것이 그 방향이다. --- p.149, 〈고전, 소설의 오래된 미래〉 중에서
문학 작품이란 평지돌출 식으로 뜬금없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 작품들의 영향과 그들 아래에서 생장하는 것이다. --- p.196, 〈늙은 심청이 웃은 까닭은?〉 중에서
허생으로 대리되는 연암에 대한 이남희의 비판을 최시한의 비판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로워 보인다. 최시한의 경우도 그렇지만, 허생과 연암에 대한 이남희의 비판 역시 반드시 온당하다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허생 처의 일장 연설에서 짐작되듯이 「허생의 처」는 페미니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쓰여진 작품이다. 페미니즘이 절대 진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맹랑한 요설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쨌든 「허생의 처」가 「허생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문학사에 보탠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전이란 이렇듯 자신을 희생(?)해서 문학사의 살을 찌우고 뼈를 단단하게 하는 구실 역시 맡는 법이다. --- pp.215~216, 〈허생의 공과 과를 묻는다〉 중에서
미당의 「나그네의 꽃다발」은 편운의 「의자」와 비슷하게 인간의 경험과 문화의 대를 이은 전승을 노래했다. 그 제목을 따 온 소설에서 구효서는 사람들이 꽃다발을 매개로 주고받는 것을 ‘사랑과 죽음의 운명’이라는 범주로 구체화했다. 아무려나 선배 시인의 시 「나그네의 꽃다발」은 후배 작가의 소설 「나그네의 꽃다발」로 재탄생했다. 그렇다면 구효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처럼, 문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 역시 누군가한테서 꽃다발을 전해 받고 또 누군가에게 전해 주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 일들이 모이고 쌓여 문학사가 이루어진다.
--- p.235, 〈그대, 꽃다발을 받으시려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