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을 떠난 지 10년을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났다.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경제 총수로서 근신하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숙제를 하지 않고 미루고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함을 떨치지 못했다. 경제 분야의 일을 하면서 겪은 일과 이들 일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설령 나를 너무 내세우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나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방침을 정했다. 함께 일을 했지만 실제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여부를 혼자 생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의 생각이 최선이거나 올발랐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일할 당시의 생각, 정책을 수립할 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밝히기로 했다. 또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아이디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상사나 동료, 또 전문가나 학자, 기업인으로부터 들은 것, 또는 책이나 보고서, 언론 매체로부터 들은 것이나 본 것 등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가릴 수 없다. 책 내용 중 공감하는 것이나 잘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한 것으로, 잘못된 것은 내가 한 것으로 치부해주기 바란다.---pp.5-6‘머리글’ 중에서
1997년 3월 5일 경제부총리 임명장을 받았다. 한보 부도에 따른 검찰 수사로 온 나라가 어수선할 때였다. 금융 대란설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개각 발표로 몰려든 기자들과의 이야기 중에 금융실명제 보완 필요성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것을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엉뚱한 문제로 잠시 시달렸지만 ‘단 한 자도 못 고친다’는 긴급명령을 법률 형태로 바꾸기로 하자 실명제 소동은 곧 잠잠해졌다. 1983년 10월에 재무장관을 그만둔 지 14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돌아와 보니 경제는 물론 행정부의 조직과 운영 방식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백기 동안의 변화와 업무 현황을 파악한 뒤 정책방향을 정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간단한 현황 보고로도 경제문제는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자세한 업무파악을 할 사이도 없었다. 폭넓고 깊은 검토와 토의를 할 시간 여유조차 물론 없었다. 당장 금융시장 안정이 시급한 과제였다. 금방 효과를 낼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처럼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수습 방안은 없었다. 당장 문제인 한보에 대해서는 선 파산, 후 대책의 원칙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금융시장은 국내 문제이기 때문에 급할 경우 한은자금을 푼다든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면 안정을 되찾을 길이 있어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해외 쪽이었다.---pp.20-21‘경제부총리가 되다’ 중에서
한보 부도를 겪으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부도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통령은 업무 보고 때마다 부도를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1997년 경제부총리 취임 후 일주일도 안 되어 삼미특수강이 부도에 몰렸다. 부도처리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서둘러 법정관리 신청을 해서 넘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진로가 부도 상황에 내몰렸다. 대통령은 한보 부도를 낸 것을 후회하면서 어떻게든 부도만은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부도내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부도를 내지 말라는 당부는 재경원이나 금융기관에게 할 것이 아니라 기업 경영자에게 해야 하는 말이다. ‘부도는 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pp.85-86‘경제부총리가 되다’ 중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외환위기처럼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면 으레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를 만든다. 미국은 9.11 무역센터 테러 사건을 몇 년에 걸쳐 조사한 뒤 「9.11 보고서」를 만들었다. 2008년의 금융위기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원인과 대책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대책을 펴가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의 나라 중에서 태국도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위기의 원인, 무엇을 잘못했는가, 누가 잘못했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보고서를 만들어 발표했다.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경제원로 누쿨을 위원장으로 위촉해 6명의 경제 전문가에게 이 일을 맡겼다. 그들은 몇 달 동안 관련자를 면담한 뒤 보고서를 발표했다. 경제위기에 이른 과정의 잘잘못을 가렸다. 「누쿨 보고서」가 그것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일이 없다. 물론 「IMF 백서」도 없다. 한때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국난이라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엄청난 위기를 겪게 되었는지, 앞으로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경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든 일이 없다. 물론 학자들이나 개인연구소 차원의 보고서는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외꿈위기의 원인을 밝히고 수습대책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정리한 보고서는 없다. 한심한 일이다.---pp.171-172‘환란주범 만들기’ 중에서
지금도 누가 말을 하면 나는 “아니야”하는 말부터 한다고 핀잔을 자주 듣는다. 이런 말버릇이 제2의 천성처럼 된 것은 예산국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생겼다. 재무부 국고국 사무관으로 일할 때만 해도 그런 입버릇은 없었다. 경제기획원 예산국 사무관으로 옮겨 일하면서부터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예산 요구를 하면 그 내용에 대해 검토도 하기 전에“안 됩니다”라는 말부터 하고 시작했다. 그만큼 나라 살림을 꾸려가기 어려웠다. (중략) 법무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하! 교도관들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수당을 좀 인상해주십시오”하고 건의했다. 마지막 보고회의에 서는 보고를 듣고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요구를 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총리가 답변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도움을 주기 위해 부총리 자리로 급히 걸어가는데 “강 국장, 가지 말고 거기서 바로 얘기해” 하고 대통령이 말했다. 예산 국장 의견을 곧이곧대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노맨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회의 참석자들에게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회의실은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교도관 수당을 인상하면 다른 수당들도 함께 인상해주어야 합니다.” 파출소 순경, 등대수 수당 등 교도관과 똑같은 금액의 수당을 받는 각종 수당들을 차례대로 말했다. 그러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인상에 반대한 것은 교도관 수당만 인상해서 될 일이 아니고 다른 직종 수당도 함께 인상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pp.198-200‘국가 예산을 편성하는 일’ 중에서
과거와 같은 고물가 속의 과열경기는 지양해야 한다, 그 이유는 기업의 수익증가율이 연 40%를 상회하고 있고, 농산물 가격이 연 20~30%씩 상승하고 있다. 인력난이 가중되면서 임금이 연 30% 이상 상승하고 있고, 이례적인 부동산투기와 소비증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갈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이 저축 여력 축소, 국제경쟁력 약화를 초래해 성장 잠재력을 잠식할 뿐만 아니라 소득분배의 악화 등으로 사회불안을 고조시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일시적 불황은 감수해야 한다. 오늘의 경기 후퇴는 원유 등 해외 원자재가격 급등 등 대외 여건의 악화와 더불어 지난 2~3년의 이례적인 과열경기에서 오는 반작용 현상이다. 따라서 보다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적정 경제성장률과 실업률의 상한, 물가안정 수준과 감내할 수 있는 수출 및 국제수지 목표를 책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모든 정책을 일관성 있고 기동성 있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 원가 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농산물가격 안정, 임금의 과다한 인상 억제, 기업의 명목이윤 축소 등 강력한 소득정책을 추진하고 금리자율화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 이렇게 안정화시책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pp.445-446‘안정화시책, 5공 정책 기조로’ 중에서
나는 공무원 출신이다. 국회의원도 하고 공직을 떠난 생활도 했지만 공직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냈다. 공무원은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 등 여러 대통령을 모시고 일을 했다. 공무원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이 어떻게 김영삼 대통령 밑에서 경제부총리를 맡느냐는 소리를 들은 일도 있다. 나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운 나라경제를 바로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지 김영삼 대통령을 중심에 두고 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보다는 나라가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자세도 대통령 지시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나라의 잣대로 먼저 검증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없는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예산편성 관련 일을 하는 가운데 제2의 천성처럼 된 것 같다.---pp.697-698‘후기’ 중에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생각할 때는 정부가 해야 할 일임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울러 정부가 할 일이 아니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임에도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려 제자리를 찾도록 노력했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왜 정부에서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부 관리의 책상머리가 아닌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을 가려서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안정화시책이었다. 즉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경제가 운용되도록 하고 그에 따라 정부가 해야 할 역할과 기능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해온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풴은 물론이다. 정부가 하는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pp.700-701‘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