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들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에게 속한 공간이다. 그 규율들이 모호해서 교회에 들어가도 되는지, 방문이 신자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닌지 여부를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특히 접근이 쉽지 않다. 가톨릭교회인 명동성당만이 유일하게 행인이 읽을 수 있는 정보 표지판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유사 고딕 양식의 이 건축물은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내부로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일반 교회들은 십자가, 종,
예수를 재현하는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시각적 요소를 통해 기독교를 환기시키고는 있으나, 그러잖아도 다양한 양식과 기능이 혼재하는 도시에 신비스런 기호를 하나 더 추가하는 낯선 사물들이었다.
--- p. 70
일련번호는 차이를 두지 않는 논리적 체계 속에 모든 건물을 포괄하는 통일성을 마련한다. 이와 달리 건물의 이름은 건물과 건물이 구별되게 한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은 광고 효과를 위해 아파트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가깝다. 이 이름을 단 아파트를 소유한 이들은 이 이름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한국에서 아파트 이름은 아파트가 브랜드에 속하는 상품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공자는 이름을 바르게 함으로써 일이 성사되게 한다고 하였는데, “아파트 이름 바꾸면 가격 오르려나”라는 기사를 읽어보건대,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현실을 바꾸려면, 즉 아파트 가격을 올리려면 이름을 고치라는 것으로 공자의 말을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 p.84
글에 담긴 힘, 목소리를 문자화해 고정시킨 그 강력함에 대한 믿음이 한국에는 분명 존재한다. 한국처럼 상시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나라에서, 전통적인 방식대로 손으로 직접 쓴 대자보 한 장이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2013년 12월 한 대학생이 손으로 써붙인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기억할 것이다. 마치 대자보라는 형식이 문서와 서예에 대한 수백 년 전통의 권위를 항의의 행위에 부여한 것만 같았다. 이 항의는 이후 인터넷을 통해 맹렬히 번지며 릴레이 대자보 시위를 이끌어냈다. 이 대학생의 대자보 글이 단순히 페이스북에 올려졌던 글이었다면, 과연 동일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 p.96
이 노인도 역시 쓰레기를 처리한다. 그는 난지도와 같은 산을 만들지는 않지만, 자신의 손수레를 꽉 채우는 작은 더미를 쌓아올린다. 이런 활동은 프랑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업적으로 시 당국이나 사기업에 고용된 사람만이 길가에 놓인 쓰레기를 수거한다. 이들이 전면 파업에 들어가는 순간 거리는 불쾌한 쓰레기 냄새로 진동한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발전되어온 폐지 수거 활동이 외국인 관찰자에게는 상당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성별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동네 골목길에 웅크려 앉아 쓰레기를 분리하고 폐품을 모으는 장면을 목격할 때 말이다. 각자 수거를 담당하는 재활용 품목이 있는 것인지, 어떤 조직망으로 활동하는지, 저마다 할당된 구역이 있는지 혹은 급여는 얼마나 받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파업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p.143
꽃으로 함께 추모하는 일은 담장 밖의 나쁜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아니라 내 옆에 나와 함께할 좋은 이웃과 나를 도울 친구, 내가 도울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고 서로 확인하는 일이다. 숨을 쉬고 있는 이 땅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고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다. 좁은 내 집 안에 숨기보다 내 집보다 더 크고 더 열려 있는 ‘이곳, 우리의 집’, 나와 내 이웃의 마을에 살겠다고 선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공포가 창궐하는 시대일수록 꽃은 유용하다. 꽃으로 ‘간단하게’ 이웃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자. 꽃이야말로 공포의 전염을 막는 백신이다.
--- p. 204~206
그러나 오늘날 대형마트 ‘고객’과 노동자는 싸우지 않는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한 고객이 화가 나면 매장 매니저가 뛰어와 불만을 표하는 고객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진상’ 고객이라면 매니저가 나타나지 않는 사이 계속 분풀이를 할 것이다. 대형매장의 소란을 우리는 갑의 횡포라 부른다. 반면 싸움 소리를 포함해서 시장의 소란스러움은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상대방의 가격이나 선전 방식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상인과 상인 사이의 싸움, 값을 치르는 손과 주인 사이에 시비가 이는 일은 시장에서는 일상적이다.
--- p. 214
프랑스 사람들에게 에펠탑은 국보 1호일까?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은 에펠탑이 프랑스에서 제일 유명한 건축물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테지만 에펠탑이 프랑스를 가장 잘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프랑스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물론, 한국의 문화 관치官治만이 어떤 공동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건축물을 고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건축물을 고르는 방식으로 ‘공식’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만 랜드마크에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랜드마크를 짓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랜드마크가 기꺼이 대표할 공동체의 내용을 고민하는 일이고, 공동체의 사연과 기억이 거주할 장소들의 풍경을 더 세심하게 보살피는 일이다. 무엇도 나누지 못하는 사회를 대표하는 커다란 물건은 자랑스럽기보다 부끄러운 표식이 되기 쉽다.
--- p.246
빅토르 위고는 바리케이드를 바라보는 자들이란 늘 양쪽으로 나뉜다는 점을 간파했다. “누가 이것을 쌓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가 이것을 부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빅토르 위고는 바리케이드는 저항하는 자들, 혁명군의 것이라 보았고, 이를 ‘격동의 즉흥연주’라 불렀다. 그는 1830년대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 “서로 너무나 다른 여러” 사람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이상이나 사유를 지지하기 위해 뭉친 이들”이 길거리 보도블록뿐 아니라 건물에서 떼어낸 문짝, 철책, 차양, 창틀, 솥단지, 온갖 것으로 보도블록을 쌓는 모습을 생생히 묘사했다. 바리케이드는 저항하는 자들의 것이면서 반달리즘과 결부된 파괴의 기술이기도 했다. 바리케이드를 쌓으며 저항했던 이들, 이름 없는 혁명군의 동요와 격렬함이 프랑스 공화국의 역사를 만들어낸 탓일까? 프랑스 사회는 반달리즘을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이제껏 스타디움, 공연장 등 흥분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여 있는 장소에서 발생하는 일부의 반달리즘에 관대한 태도를 취해왔다. 흥분한 시위대 사이에 끼여 집회의 목적과 상관없이 사방에 스프레이 낙서를 하고, 거리에 주차된 민간인 차량을 훼손하거나 상가의 유리창을 깨고 약탈을 하는 이들을 ‘브레이커’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프랑스 시민, 미디어, 공권력은 일부 브레이커가 목소리를 높이는 전체 시위대를 대표한다고 보지 않는다
---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