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과 3월에 간선 도로를 따라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장소에서 교회 예배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야기되었고, 이곳 평양의 상황은 상당히 불안정했습니다. 교회 예배 참석 인원은 주일에 최저 250명까지 떨어졌습니다. 러시아 정찰병들은 도시 북쪽 성벽에서 일본군들과 총격전을 벌였고, 모든 성문은 닫혔으며, 성벽 외곽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초병들은 우리 선교사들이 교회 예배를 위해 들어오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많은 가족과 거의 모든 젊은 여성과 어린이가 일본군이 성에 들어왔을 때 시골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한동안 여성 모임과 여학교는 중단되었습니다. 남학교의 출석수는 약 200명에서 50명으로 감소했고, [숭실]중학교 학생의 1/3이 집안일을 돌보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공포는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전체 공동체를 안정시켜서, 일본군이 접근한다는 단순한 소문에 도시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1894년의 피난 사태와 현저하게 비교되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자기 가족과 함께 남아서 평소처럼 일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의 태도에서 나오는 확신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대해 기꺼이 증언합니다. 교회는 도시 생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요소가 된 것이 확실합니다.
--- 「 마포삼열의 1904년 5월 12일 서신 」중에서
상인들이 여러 날 동안 상점 문을 닫고 한가해지는 2월의 구정 정월 초하루에 도시 교회의 남성과 여성을 위한 사경회를 시작하기로 한 계획이 이미 세워졌습니다. 스왈른 목사는 신학 수업과 관련된 그의 사역을 마쳤고, 저는 시골에서의 성공적인 두 사경회, 즉 번하이젤 목사와 함께했던 사경회와 블레어 목사와 함께했던 사경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번하이젤 목사와 함께했던 사경회에서 저는 교회 위에 임한 큰 영적인 축복을 보았으며, 블레어 목사의 사경회에서는 불신자들의 회심을 추구하는 열심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도시 사경회와 연관하여 도시에서 개최할 정기 전도대회를 계획했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오래된 교회 건물에서 약 150명의 남성을 가르쳤고, 선교지부의 여성 선교사들은 중앙[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반에서 150명 이상의 여성을 가르쳤습니다. 오후에 우리는 이 두 반을 중앙교회에서 토론회로 합쳤는데, 400명 이상의 남성과 여성이 출석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가족 종교, 결혼, 주일성수와 신실함 등의 주제를 토론했으며, 이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각각 4명 혹은 5명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체계적으로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집을 방문해 중앙 교회와 남문교회에서 열리는 저녁 집회에 나오라는 내용이 인쇄된 초대장과 소책자를 배부했습니다.
--- 「 마포삼열의 1905년 3월 9일 서신 」중에서
한국의 설날인 1월 25일에 우리는 각각 200명 이상이 출석한 남성과 여성을 위한 도 사경회를 시작했으며, 그와 관련해서 도시 전체를 위한 전도 대회를 계획했습니다. 우리는 번하이젤 목사가 관리하는 네 번째 교회를 막 분리했습니다. 이로써 평양 시내에는 4개의 장로교회와 2개의 북감리회 교 회가 있고, 이 여섯 곳에서 매일 밤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짧은 기도회 후에 소책자와 초청장을 가지고 도시 전체에 매일 전도하러 나가며, 밤에는 기독교인들이 놀라운 간증을 하는 전도 집회가 열립니다. 5일 동안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제출한 700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작년의 놀랄 만한 기록을 갱신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 12년 동안 한국의 가장 사악한 도시인 평양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경이로운 은혜의 사역을 펼치셨는지요! 12년 전 이맘때 저는 첫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도시에 4개의 장로교회와 2개의 감리교회가 있는데, 지난 주일에 약 2,500명이 교회 예배에 출석했고, 도시에는 5,000명 정도의 기독교인 인구가 있습니다.
--- 「 마포삼열의 1906년 1월 31일 서신 」중에서
이제 우리가 한국의 북부 사역에서 채택했고 그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믿는 몇 가지 방법을 언급하겠다. 첫째, 복음 메시지를 단순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것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사명과 복음 메시지를 완벽하게 솔직하고 또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천명하고 제시하되, 가장 자연스러운 대화의 주제와 관심사로 제시하고, 사역의 중심지로서 전략 지점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는 최대 한 넓은 범위의 영토에 복음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만일 소책자를 널리 전파하고 선교사가 장기 순회 여행을 함으로써 복음을 주민들과의 대화 주제로 삼을 수 있다면 중대한 지점을 확보한 것이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은 선교사의 개인적 선호와 성향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길거리나 장터나 거리에 예배 처소를 개설하고 군중에게 정식으로 전도하는 방식을 채택하겠지만, 한국인의 특성에 더 적합한 방법은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매일 자연스럽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이다. 길가, 여관, 거리, 상점, 시골 마을 등 어느 곳에서나 이 중대한 주제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자는 당신의 “사랑방”으로 오라는 초대와 함께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복음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널리 보급하면, 광범위한 지역으로부터 방문자들이 오는 결과를 낳는다. “사 랑방” 사역은 손과 손을 잡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만나 복음의 주장을 방해 없이 분명하고 적절하게 전하고, 인격적으로 진정성 있게 개개인을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사랑방 대화가 가장 많은 진실한 개종자를 만들었다.
--- 「 마포삼열의 1904년 11월 「코리아 필드」 기사 “한국 복음화의 정책과 방법” 」중에서
선교지에서는 죄와 타협하지 않을 사람들?하나님이 세우신 성경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들의 자격 요건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교도의 세계에서 특정한 상황이 무엇이든 도덕적 문제, 결혼 관계, 술 취함,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낮출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바에 미치는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가 관대하고 사랑이 넘칠지라도, 죄 지은 자를 훈육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모든 것을 죄로서 규정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적 도덕성과 기독교 지위의 기초 전체를 약화시키며 도덕적 또는 영적 권능으로서의 교회를 유약하고 힘이 없으며 영적인 기반이 없는 곳에 세우는 것이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만족하고, 면책을 받아서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도 괜찮다고 배운 이름뿐인 기독교 무리, 즉 기독교적 삶의 기준인 하나님의 법을 일부러 포기함으로써 영적인 자살을 한 사람들보다는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성취를 위해 분투하기로 철저하게 결심한 기드온의 군대가 더 낫다.
--- 「 『장로회의 선배 선교사들이 신규 선교사들에게 주는 조언』에 마포삼열이 쓴 글, “복음화의 전제 조건과 원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