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선악과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더 이상 향상할 데가 없이 이상적인 상태로 지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이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선악과는 오직 그들을 파멸시키기 위한 목적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의 멸망을 은밀히 원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이상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므로 선악과의 금령이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무엇을 보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금령을 어길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금령을 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와 그것에 걸린 금령이 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금령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으로서 이상적인 상태 곧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완전히 순종하는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 p. 29
그런데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없었으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음식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음식을 제공하시기 전에 자기 힘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훨씬 큰 유혹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극단적으로 허기를 느끼고 있지만, 하나님에게서는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다릴 것이 뭐냐, 네가 능력이 있으니 너의 필요에 따라 떡을 만들어서 먹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이 마귀의 제안이고 예수님에게는 강력한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의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제안의 내용은, ‘너는 지금 주려 있고 떡을 먹어야 산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생명을 유지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을 의지하지 말고 네 능력으로 네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 pp. 56-57
엔돌의 무당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전체 이야기를 신접한 여인의 속임수라고 봅니다. 화급한 일을 당하여 점쟁이를 찾는 사람은 대개 필사적이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속이기가 쉽습니다. 이성적인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사울은 심리적으로 극히 불안정했을 뿐만 아니라 식음을 전폐하여 신체적으로도 허약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허깨비도 잘 보이는 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신접한 여인이 실제로 사무엘을 불러낸 것처럼 보일 뿐더러, 사무엘의 말이 전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그 난제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엔돌의 무당에 의해 나타난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로 볼 수도 있고 귀신의 환영일 수도 있다는 것이 한 가지 문제이고, 그렇게 사무엘을 올라오게 한 것이 하나님일 수도 있고 마귀일 수도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인데, 이 경우의 수를 조합하면 네 가지 경우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올려 보내신 진짜 사무엘이다, 하나님께서 무당에게 보이신 가짜 사무엘이다, 마귀가 불러온 진짜 사무엘이다, 마귀가 무당에게 보이게 한 가짜 사무엘이다.’ 이것을 놓고 교부시대부터 종교개혁 시대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 p. 170
마지막으로, 선지자가 선지자를 속이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또한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의 문제가 앞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유다가 망할 때에 이런 일이 대규모로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남조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자기 땅에 남아서 조공만 바치면서 평안히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렇게 살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가지고 백성을 속여서 그 기회를 차버리게 만든 사실이 있습니다.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속이고 참 선지자를 괴롭히는 일은 남조 유다가 망할 때에 현저하게 일어나더니,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극심했고, 그 이후 교회 시대를 통해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가까우면 이런 일이 다시 극심해질 것을 성경이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순결해야 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 p. 190
이 행위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요소가 현저하게 떠오릅니다. 첫째,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수입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고 그것으로 수입을 얻는 직업이 선생의 직업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그 대가로 수입을 얻는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일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양식을 사람들에게 공급합니다. 그러면 그 공급을 받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공급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것을 주고받는 가운데 교제가 있어서 그것이 또한 사람들을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일반 직장과 똑같은 수준에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의 원칙은 복음 전파에 임하는 사람들은 오직 그 일에만 전념하면서 나머지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금전적인 수입에 대한 고려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를 돈을 벌기 위한 다양한 직업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출발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입니다.
--- pp. 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