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발레단 최고령 발레리나인 나의 은퇴를 축복하며 뜨거운 포옹과 아쉬움의 입맞춤을 나눴다. 그러다 환한 빛이 느껴져 객석으로 눈을 돌리자, 눈앞에 1,400개의 하트가 펼쳐졌다. 관객 1,400명이 붉은색 하트가 그려진‘고마워요, 수진DANKE SUE JIN’카드를 펼치며 내 이름을 외쳤다. 관객석이 온통 붉은 하트로 가득했다. 상상도 못한 깜짝 이벤트였다. 그 순간의 감격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감동의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그 마음에 보답하는 일이 무엇일지를 마구 떠올렸다. 발레리나로서의 마지막 무대, 그날 관객들이 보여준 큰 사랑이 내게 새로 시작할 힘을 주었다.
-‘프롤로그-무대는 끝나지 않는다’(19쪽) 중에서
30년간 발레를 하면서 수천 번, 수만 번 넘어졌다. 무대에서 넘어지고 부상을 입어도 웃으면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돌이켜보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후회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지금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꿈은 손끝에 닿아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내 인생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해다. 나는 발레를 위해 내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발레를 하는 내내 행복했다. 발레가 나 자신이고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강수진의 Ver.2’(310쪽) 중에서
한 명 한 명 이름이 발표될수록,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상 가능성은 작아졌다. 장내는 폭발할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뱅 씨지에므vingt-sixieme.”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나는 누군가 무대 위로 나가겠구나 생각하고, 무대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장내에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넘버 트웬티 식스twenty six!” 세상에, 바로 나였다! 내 허리춤에 달린 26번 번호표와,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신 마리카 선생님의 환한 웃음이 내 수상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1985년 로잔 콩쿠르에서 최고점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 강수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뉴욕에서, 로잔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나를 만든 것들-열정은 혼자 태어나지 않는다’(55쪽) 중에서
다방면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주목받는 세상이지만 나는 평생 발레 하나만 보고 살았다.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내가 선 무대에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내일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겠다고 말하기보다는 오늘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삶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내일 발레를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 그런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발레를 오늘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했다.
-‘100%의 하루-오늘이 나의 완벽한 무대다’(88쪽) 중에서
발레단
나 역시 많은 안무가의 뮤즈로 불렸다. 그리고 운 좋게도, 동시대 활동한 거의 모든 위대한 안무가들과 작업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수진, 너를 위한 작품을 만들려고 해”라고 제안한 안무가도 있었다. 안무가들이 창작할 때 그들의 파트너 무용수로 작업하면, 내가 표현하는 동작이 한 작품의 오리지널이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안무가 지리 킬리안Jirvi Kylian과 작업했을 때, 그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수진, 네가 가진 특별함은 뭐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한국무용의 기본 동작을 보여줬다. 발레와는 다른 방식의 움직임을 골똘히 지켜보던 킬리안은 그 동작을 모티브로 삼아 모던 발레 작품〈스테핑 스톤Stepping Stones〉을 창작했다.
-‘강수진 스타일-나답게 인생의 무대에 올라라’(126쪽) 중에서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수많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넘어지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가 곤두박질쳐 망신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인생에서 넘어지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일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그 무대는, 그 인생은 거기서 끝난다. 수없이 일어섰기에 사람들이‘강수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듯이, 당신도 세상이 모두 아는 당신만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절벽 앞에서-슬럼프가 찾아오면 느리게 걸어라’(180쪽) 중에서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뒤 이 자리에 서고 보니, 발레단 멤버들이 오늘 어떤 표정으로 잠에서 깼는지, 이 훈련이 얼마나 고된지, 마음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사람 간에 문제가 생겨 힘들 때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든 것 같고, 한 걸음도 더 못 걸을 것처럼 막막하다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나 역시 암흑의 시간을 수십 번도 더 걸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힘든 마음에 지지 않고 한발 더 내디딜 수 있도록 그 곁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선배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