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장을 열며
여기 오신 모든 분들은 삶의 길을 스스로 열어나갔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면서 겪은 성공과 좌절, 열정과 노력은 교실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왔고 참여한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차례의 강연으로 흘려버리기엔 이 감동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강연회엔 강연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대화가 있었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에서부터 강연, 그 뒤로 패널에 참여하신 교수님들의 질의와 보충 설명, 강연회에 참여한 학생들의 진지한 반응이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이어졌습니
다. 이 생생한 대화의 장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습니다. 사실 강연을 해주신 분인들 어디서 이렇게 좋은 패널과 진지한 청중을 만나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이 책을 출간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은 건 바로 이 대화의 모습이었습니다. ---기초교육원장 서문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이런 시로써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먼저 ‘아닙니다’로 시작하겠습니다. 연이 아니라 불연입니다. 옛말 정언약반, 이 말을 풀어보건대 진리는 ‘아니다’로 시작한다는 뜻이겠지요. 시는 산업이 아닙니다. 시는 펀드가 아닙니다. 또 시는 힘이 아닙니다. 힘에의 소도구가 아닙니다. 시는 안전보장이 아닙니다. 영원한 불완전입니다. 그래서 시는 자유입니다. 시는 은유인가 아닌가. 다른 사물을 이끌어다가 어떤 사물을 장식하는 은유라면 그것은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은유의 폭력이지요.
나는 언젠가 시를 시의 첫날밤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의 태초성, 선사성, 그 원시성, 그리하여 그 선사적인, 선천적인 충동으로서의 신명을 함께 솟구쳐내는 그 천지 공명의 교류의 천연성으로부터 시의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은밀하게 믿었습니다. 옛말에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있지요. 시 역시 거의 생이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시를 체험이라고 말한 것도 그 체험은 운명으로서의 처음을 아로새기는 일일 것입니다. 바로 이 처음으로 만난 시가 내가 꿈꾸는 시입니다.
만남이야말로 최초입니다. 그래서 이미 있는 시와의 만남이 그 시의 새로운 세계이며, 내가 쓴 모든 시는 그때마다 시의 처음이자 처음의 시가 되지요. 시는 태어난 그대로가 아니라 그 시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처음이 개막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는 또한 화생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문자언어로 작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화학물질처럼 전혀 다른 언어 세계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사랑을 아주 절정으로 묘사할 때, 사랑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시는 시의 화신이지요.
실제로 올봄, 독일 베를린에서 시인들이 몇 사람 모여서 일주일을 지냈을 때, 어떤 인도 시인이 나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시인이 아니라, 시다.” 그때 나는 내가 한 편의 시로 보이고 있구나, 그런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에 대한 답으로, 내 시에 대한 즉각성은 특히 80년대 현장에서는 불가피했습니다. 실지로 학생들이 분신, 투신하는 현장이나 고문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밀실의 연금술로 언어 하나하나를 돌에 새기듯이, 또는 가열하여 응고시키듯이 할 겨를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시의 본래 면목은 이와 같은 시의 즉각성일 거예요. 모든 문학 행위가 불가능할 때, 아니 그 행위가 끝났을 때 그 바람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시입니다. 감옥의 가혹한 감시하에 은박지나 나뭇조각, 또는 치약 포장지 따위에 시 몇 줄의 비밀 시를 쓸 수 있는 거지요. 세계의 마지막에도 시는 남을 것입니다. 그런 시의 처절한 비극성으로 나의 현실 참여 시기의 시가 고은의 시는 호흡이다, 토해 나온다고 말해지고 때로는 거칠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고은: 나의 삶 나의 시 ― 백 년이 담긴 오십 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