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새 울음 사이로 황소 울음소리도 간간이 섞였다. 넓디넓은 들판의 군데군데에 밭갈이하는 황소들과 소를 모는 촌부들의 모습이 보이고, 가맛길에는 지게에 거름을 져내는 상머슴들이 띄엄띄엄 줄을 이었다. 들판은 온통 소나기 쏟아지듯 부서져 내리는 노란 햇살과 아른대는 아지랑이로 살아 넘실대는 것 같았다.
논개는 이 들판이 좋았다. 돌무덤같이 엎드린 초가들을 병풍으로 둘러치듯 마을 뒤편에 버티고 있는 선학산도 좋지만, 동리 앞으로 탁 트인 도동 들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들판 끝자락에는 남강(南江)의 하류가 푸르게 흐르고 그 강변의 모래는 유난히 반짝였다. (중략)
“흥, 양반 도포 자락 바람이라도 쑀는지 반말지꺼리하는 태는 몸에 뱄더라마는, 척하는지도 모리제. 그렇지 않으면 딸자식 이름이 양갓집 규수들처럼 고상하지 몬하고, 상민들이 아무렇게나 지어서 부르는 ‘논개’냐 말이다….”
노비는 논개 집을 벗어나면서 쉼 없이 빈정거렸다. (중략)
“배를 곯게 되믄 생각이 달라지겄제. 꼬락서니 보니께 명줄도 코앞에 닿인 것 같은데, 제 년 죽고 나믄 우짤 것인가? 아무리 딸자슥 종년 시키고 싶지 않아도 논개는 우리가 데려올 수밖에….”
노비는 걸음을 빨리하면서 입귀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생의 민들레」중에서
“그래, 나는 성은 강이요, 동 자, 찬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이고, 이분은 민씨 성에 구 자, 식 자 함자를 가진 분이시다. 됐느냐? 그럼 다시 물어 보자. 어디에 사는 누구 집 여식이며 몇 살이더냐?”
“지는 열한 살이고, 부모는 안 계십니더.”
“그으래? 집은 어딘데?”
“산에 삽니더. 그란데 아재들은 머 하는 분들입니꺼? 이병입니꺼?”
청년들이 다시 흠칫 놀라는 표정들이 되어 논개를 유심히 살펴보듯 한다.
“네가, 의병을 아느냐?”
“잘은 모립니더. 나라를 지킬라고 몸 딲는 사람들이라고 들었습니더.”
“그래? 제대로 잘 아는구나. 그런데, 산에 산다니 네 집이 이 산속에 있단 말이냐?”
논개가 배시시 웃는다.
“이 산이, 제 집인 기라예! 잘 가이소.”
논개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 옆을 스쳐서 위로 올라간다.
“게 섰거라. 논개라고 했더냐? 이 산이 산일 뿐이지 어떻게 너의 집이란 말이냐?” (중략)
골짜기로 내려가던 강동찬은 조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어 민구식을 돌아보았다.
“민 형. 우리가 지금, 여남은 살 아이한테 쫓겨 가고 있는 것이 아니요?”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이러는 것이 순리인 것 같으니 어쩌겠소. 그 아이, 범상한 여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슬 푸른 몸짓과 이치에 들어맞는 찰진 말과 눈빛이, 어디 보통 아이 같습디까. 성깔과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 같아요.”
“머리는 산발하고 못 먹어서 삐쩍 마르고 살갗은 그을려서 검붉었지만, 안광에 빛이 있고 콧날은 오뚝하고 여간 기가 세어 보이지 않습디다. 그런데, 어찌해서 아이 혼자 산에 사는 것인지….” ---「산에는 산새가 울고」중에서
“글자는 서당에서만 갈치는 기 아이고, 니만 한 여식아들만 모아 놓고 예뿐 아지매가 갈쳐 주는 데도 있다. 내가 마님이라 카는 사람은 양반집 어른이 아니고 그 아지매를 말하는 기다.”
방물장수가 논개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
“니가 천출인 종놈 종자도 아인데, 와 종년으로 보낸단 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린 기라. 씰데없는 극정 말고 쌔이 가자.”
방물장수가 다시 돌아서 앞장서고, 논개는 뭔가 조금은 석연찮은 기분인 채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자 서당도 있는가 보네예?”
“가 보모 안다.”
“글도 배우고, 일을 해 주모 밥도 얻어묵고 잠을 잘 수도 있는 뎁니꺼?”
“극정도 많다. 그런께네 내가 니를 데리다주겄다 카제. 부모도 없고, 묵고 잠잘 데도 없는 니한테는 그런 조건이 먼첨인데.”
논개는 궁금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안도감을 가졌다. 글도 배우고 먹고 잠잘 수 있다면 웬만큼 힘든 일은 다 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물장수가 논개의 손을 잡고 다다른 곳은, 남강과 강 둘레의 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 후미진 곳의 아담한 기와집 앞이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얼핏 보아 도동의 강 진사 댁처럼 안채와 사랑채와 행랑채가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고, 따라서 양반집 같은 느낌 때문에 논개는 잠시 긴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애잔한 퉁소 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와 좀 전에 경직되었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기는 했다. ---「운명의 신이여」중에서
설매와 반월이 서두르며 안채로 돌아가자 아이들이 대청마루에 모여 앉았다가 화다닥 일어났다. 아이들의 얼굴은 누구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상기되어 입가로 웃음을 머금고 있고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나란히 서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들을 한 채, 안채 마당으로 들어오는 설매와 반월을 쳐다보았다. 매분의 머리 얹기 의식이 아이들을 많이 흥분시킨 것 같았다.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거라. 잠자기 전에 공부들을 좀 하고.”
설매의 큰 음성에 향녀, 금지, 옥매가 실망스런 낯빛으로 어깨를 내려뜨리면서 돌아섰다. 논개도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다시 몸을 돌려 설매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매분이 성님 머리 얹었습니꺼예? 이뿌던가예?”
설매가 그만 푹 하고 웃는다.
“그래예. 머리 얹었어예. 이뻤어예. 됐어예?”
설매가 논개 말투를 흉내 내자 아이들이 돌아보며 키득거렸고, 논개는 그만 뺨이 붉어졌다.
“잘몬했습니더. 곤칠께예.”
논개가 우물거리면서 아이들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은애의 아지랑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