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마치 만화경과 같다. 들여다볼 때마다 매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만화경 속에는 아름다운 색깔의 조그만 돌들이 가득 들어 있다. 흔들 때마다 다른 그림, 다른 조합을 보여준다. 하지만 절대 거기 들어 있는 돌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는 없다. 그러니 그저 지금 보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는 끝도 없을 만큼 넓디넓지만,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은 늘 나를 감질나게 하는 짧은 장면들뿐이다. --- p.25
엄마가 3주간의 인도네시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1월의 어느 날, 공항에서 세 식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짐을 찾아 출구로 나오면서 엄마는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올 뻔했지. 행복에 겨워서 한달음에 달려갔어.
엄마가 죽는다면, 그때처럼 억누를 수 없는 기쁜 마음을 안고 이 땅에 작별을 고하고 너희에게 달려갈 거야. 우리 가족 셋이 그 문 뒤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야. --- p.34
티모는 한참 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피니에게 매달려 있는 동안, 고맙게도 티모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주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가서 말하곤 했습니다.
“가도 돼, 기쁜 마음으로 떠나. 아빠가 아름다운 음악이있는 빛의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 p.75
나는 보이지 않는 내 천사 옆자리에 앉는다. 내 케이크를 다 먹고, 천사 앞에 놓인 가장 큰 케이크 조각을 내 앞으로 끌어놓는다.
“아줌마는 티모가 지금 내 일부분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제 아줌마가 이 케이크를 먹을 거야. 그러면 티모도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을 거야. 티모도 함께 먹는 거란다.”
아이들은 저마다 포크를 가져다가 내게 케이크를 먹여준다. 아이들의 사랑에 가슴이 찡해온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아이들의 온기를 그리워했는지 깨닫는다. --- p.101
나는 ‘아주 오래된 영혼’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을 대신했다.
이어서 자비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해리 스코트 홀랜드(Harry Scott Holand)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죽음의 춤’을 낭송했다.
아버지는 티모에게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듣고 또 듣고 마침내 외워버린 잠자리 동화를 들려주었다. 피에로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듣고 있다. 티모와 피니의 꼬마 친구들도. 모든 것이 손님들의 가슴에 가 닿았다. 어떤 이는 울고, 또 다른 이는 코를 훌쩍거리거나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쳐다본다. --- 137
수영복을 입고 큰 대야에 앉아 웃고 있는 피니, 꽃을 심느라 정신이 없는 티모, 해질 무렵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마당에 나와 있는 헬리와 나`….
‘이런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없는데, 새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지?’
현실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 p.167
병원을 에워싸고 있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큰소리로 딸 피니에게 이야기를 했다.
“네가 다시 건강해지면, 그땐 너랑 다시 숲에 갈 거야. 딸기도 따고 지렁이도 구경하고. 저기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놀자. 그러고 나서 우리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가자.”
나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찬란한 태양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한껏 기운을 받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피니를 쓰다듬었다.
“이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피니.”
나는 피니에게 속삭였다. --- p.186
고통은 나를 독점하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합당한 요구였다. 고통은 수없는 비수로 내 심장을 찔러대고 나를 아프게 한 다음, 어김없이 선물을 남겨주었다. 깨달음, 새로운 시야, 새로운 방향….
고통이 몰고 온 모든 파도를 다 넘고 나서, 더 이상 쥐어짤 눈물도, 속이 뒤틀릴 기운도 남지 않았을 때라야 비로소 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지독한 정적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후에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이미 다 맛보아서 더 이상 고통이 두렵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 p.208
지금 돌이켜보면, 심하게 흔들리는 위험한 외줄다리를 지나오고 있었던 것 같다. 발밑에는 까마득한 계곡이 있고, 계곡엔 악어들이 득실거린다. 악어들이 내는 울부짖음 소리는 내게 ‘외로움’, ‘절망’, ‘좌절’ 같은 말로 들린다.
나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눈을 돌릴 수 없고, 아래는 아예 내려다 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다음 발을 내딛는 거다. 한 발, 또 한 발….
기력이 다 떨어지면 멈춰 선 채, 다리에 낀 이끼나 지저귀는 새 따위를 보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햇살이 나를 비추고 있다. 가끔씩 멈춰 해를 쬘 뿐, 울 시간은 없다. 눈물로 시야를 가리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떨어진다면 끝장이니까. --- p.229
내 등에는 퇇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배낭이 짊어져 있다. 배낭에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과거의 일상들이 가득 차 있다. 누구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들,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사랑의 말들…. 배낭에는 세 명의 천사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열어 보이는 순간, 죽은 자들로 변해버린다. --- p.275
물론 그것은 너를 아프게 할 거야.
아주 다른 색으로, 아주 다른 말로, 아주 다른 소리로.
너를 아프게 할 거야, 계속해서.
이것만은 확실해.
그것은 아프게 할 거야, 그것은 아프게 할 거야.
왜냐하면 그게 바로 삶이니까.
멍청하고 바보 같지만 진짜이고,
지루하지만 아름답고,
늘 똑같고 거기서 거기지만,
매일 새로운 삶이니까.
그 가운데에 네가 지금 있으니까.
그곳이 바로 지금 너의 보금자리니까.
그것은 아름답지는 않을 거야, 아름답지는 않을 거야.
분명히 예전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
네가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을 거야.
그것은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거야.
네가 계속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
다른 사람들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울 거야.
다른 카드로 하는 다른 게임,
아름다울 거야, 언제까지나.
그렇다는 것은 분명해.
그것은 아름다울 거야, 아름다울 거야.
왜냐하면 그게 바로 삶이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지혜롭고 뻣뻣하지만 부드러운,
너에게 푹 빠진,
늘 똑같지만, 그러나 매일 새로운 삶이니까.
그 가운데에 네가 지금 있으니까.
그곳이 바로 지금 너의 보금자리니까.
---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