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일관된 이론적인 체계를 지닌 특정한 철학적 인간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성서는 전(前)반성적인(pre-reflective)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경험적 상식을 반영한다. 더욱이 성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역사적 상황과 세계관 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매우 다양한 이해를 보여준다. 따라서 성서로부터 곧바로 철학적인 이원론 또는 일원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성급하다. 특히 인간의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한 사고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본래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고능력을 갖지 못했다. 스올과 르바임 등의 개념에 나타나는 의미의 모호성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종말론적 사고의 모호성을 반영한다. 구약성서 후반기 이후 묵시문학기와 중간기를 지나 여러 문명의 종교 사상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묵시적 종말론, 영혼 불멸 사상, 부활 사상 등이 발전되었으며, 이러한 사상들의 영향사(影響史) 안에서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종말론적 사고의 유형들을 구조주의적 체계 안에 통합하여 “죽음-(몸이 없는) 중간상태-최종적 부활”이라는 단계적 종말론 도식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부적절한 것일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지나친 사변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성서 본문들에 대한 문자주의적?실재론적 해석을 통해 (몸이 없는) 중간상태를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더욱 그렇다.
--- 「제2장 창발적 전일론의 관점에서 본 성서적 인간」 중에서
인간의 대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계약의 성취를 통한 구속(은혜계약)의 실현에 대한 호튼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형벌대속(penal substitution)의 구속교리와 일맥상통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보다 인간의 보상적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정의와 율법이 강조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사건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 예수의 대리적 형벌 사건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의미가 약화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은혜계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 예수의 대리적 희생의 사건이라기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사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 「제7장 관계성 안의 이야기적 자아로서의 탈근대적 인간론」 중에서
클레이턴은 하나님의 행동의 자리가 통전적인 인간 실존 전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의 “인격 자체(또는 전체)의 창발적 차원”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인격은 단지 사고와 뇌 상태의 관계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 문화적 상황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의 통합된 인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경생리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예술, 윤리학 등의 인문과학이 요구된다. 우리는 그것(인격)을 자신의 몸, 환경,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회, 문화, 역사, 종교적 상황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는 정신적 상태 전체와 인격 사이에 수립되는 통합의 상태에서 창발하는 차원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클레이턴에게 인격은 정신적 인과율보다 한 차원 더 높고 광범위한 창발적 실재를 가리킨다. 정신적 인과율이 특정한 뇌 상태와 밀접하게 관계된다면 인격 자체의 의도는 개별적인 정신적 인과성에 의존한다. 나아가 인격 차원의 의도는 특수한 관념과 특수한 뇌 상태의 관계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관념들, 다른 사람들, 문화와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 등을 포함한다.
--- 「제10장 창발론적 인간 이해」 중에서
대상관계 이론가들의 인간 이해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리비도적 충동과 공격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성적 리비도와 파괴적 공격성이 인간의 전 생애를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부정적인 인간 이해와 대조적이며, 또한 인간이 유전적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인간 이해와도 긴장 관계에 있다. 인간의 자아는 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적(그리고 신학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다. 이와 같은 다차원적 요소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선천적 본성이냐, 후천적 양육이냐 하는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진화생물학은 생물학적 유전자가 사회적?자연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양육에서의 공감적 유대의 결여에 의해 초래된 자아의 미성숙과 왜곡은 오랜 기간에 걸쳐 생물학적인 유전적 특성으로 고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프로이트나 전통적인 기독교의 인간 이해처럼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나타나는 성적 고착과 파괴적 공격성(죄의 경향성)은 단지 대상관계 이론가들의 주장처럼 부모와의 대상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의 실패로 인해 생겨나는 후천적이고 이차적인 결함들이 아닌 선천적이고 일차적인(생물학적인) 결함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선천적으로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기독교 전통과 프로이트의 부정적인 인간 이해는 비록 지나치게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보편적이고 비극적인 운명으로서의 소외된 인간 실존(틸리히에게 있어서는 실존 자체가 소외다)을 잘 표상한다.
--- 「제12장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 공감적 사랑」 중에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본질은 관계성,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관계 안에 놓았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적 관계에 의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된다. 따라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독특한 본성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어떤 존재론적 구성 요소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에 의해 결정된다.
--- 「제15장 생태학적 기독교 인간론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