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극작가들은 주연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단역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왕이건, 시민이건, 정원사건 간에 대사를 하고 있을 때는 세상의 중심에 있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비극을 그려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만인의 마음을 가진 셰익스피어’라고도 한다. 그가 만인의 인간을 그리고자 하면, 만인의 마음을 모두 그려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샤일록은 악역이니까 마지막까지 밉게 만들면 될 텐데도 셰익스피어는 인간 샤일록의 마음까지 모두 표현해낸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유대인 옹호파였을까.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그들을 국가와 민족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로 다뤘다는 점은 짚어봐야 할 것이다.
즉,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하나의 대사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알 수 있다. 샤일록의 대사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나저나 앞의(“유대인에게는~”부터의 대사) 대사는 지금 읽어도 대단하다.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다면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라크 사람도 사람이다.” “베트남 사람도 사람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pp.32~33「21세기에 살아 있는 셰익스피어」중에서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이것이 겁쟁이 무사와 식충이를 유지하는 비결이지.”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기사에게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것을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가고 싶고,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다고 표현하여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만약 폴스타프의 말이 모두 계산된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를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다. 왜일까. 바로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겁쟁이 무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는 말만 들어서는 허황된 소리만 하는 것 같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보면 바보 같은 면이 많아도 결국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이다.
인간은 이상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식의 유머이다. 바보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웃으면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 한발 물러서서 리얼리즘으로 그 모든 걸 바라보면, 사람이 다 이런 거지, 라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함. 바로 거기에서 유머가 생겨난다. 그런 발상을 하면 인간을 ‘승리자와 패배자’로 구분할 수 없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긴 안목으로 봤을 때, 영원히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pp.46~47「21세기에 살아 있는 셰익스피어」중에서
왕은 권력을 갖고 휘두르지만, 셰익스피어는 왕 역시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다른 한 쪽인 일반 민중은 어떨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지배자 입장에서 보면 민중은 변덕쟁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시대의 권력자에게 들러붙는 변덕쟁이다. 하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지배자를 봤을 때는 다르다. 민중은 지배자가 공정한 정치를 하고 있으면 그에 조용히 따른다. 그러나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그 균형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폭군이 등장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리처드 2세'에 정원사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리처드 2세는 정치능력도 없으면서 간신배 때문에 국가의 재산을 전부 써버린다. 그러다 결국 볼링브룩(뒤의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그런 정치 상황을 서민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정원사 스승은 제자에게 나무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야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자기들이 잘난 줄 알고 날뛰는, 지나치게 자라버린 그런 자잘한 가지들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려야 하느니라. 우리들의 정치란 모두가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p.75「셰익스피어의 인간관, 역사관의 형성」중에서
샤일록은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고양이가 가까이 오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다 선다고 하지. 말하자면 나는 안토니오라는 남자가 싫다.”
그의 비정한 대답에 바사니오가 야유를 보낸다.
“좋아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샤일록은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미우면 죽이고 싶지,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닌가?”
이 “좋아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즉,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지 않나?’라는 바사니오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찬성이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계속 죽이면, 인류는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미우면 죽이고 싶지,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닌가?”라는 말도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3명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절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성선설이나 성악설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봤다. 따라서 그의 이런 관점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하나의 견해로 판단하면 또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pp.141~142「대사 속에 담긴 인간심리학」중에서
마르크스도 ‘실러보다는 셰익스피어’라고 한다. 라살레란 사람은 이념만을 희곡에 나타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읽고, 또 제대로 봐주었다. 그 때문에 괴테와 마르크스, 엥겔스가 셰익스피어를 읽은 방법은 어떻게 보면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적이지 않고, 자유롭게 셰익스피어를 대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념을 갖고 있었고, 예술이란 이래야 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념에서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형편없다. 그에 반해 셰익스피어는 관객 앞에서 하는 연극이니 그들에게 인간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려면, 때로는 부자연스러워도 되고, 여러 부분이 서로 부딪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 괴테이고, 마르크스이고, 엥겔스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그들과 완전히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
--- pp.106~107「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