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론은 시대의 정신 구조, 역사 감각, 내셔널리즘, 권력, 심리적·정치적 역학을 탐구하는 전략적 방법론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문화적·언어적 타자를 번역 언어로 말하는 번역은 타자의 표상을 기입하는 과정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를 통해 번역이 원전과 결코 등가일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 p.18
번역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유럽 중심주의가 타자를 억압하는 기제로 구축한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대의 번역론이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주제이다. 세계화 시대에 문화 비평으로서의 번역론은 ‘상상의 공동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번역 언어의 인식을 통해 제기한다. 나아가 문화 사이의 경계선을 수평적인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이 서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교차점으로 인식하여 번역을 동적 이동 과정에 있는 창조로 이론화하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 다원성과 동적 역동성으로 번역을 인식하는 관점은 원전 자체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 p.19
제국의 정복자들은 점령지의 타자에게 효율적으로 임무를 전달하는 방법만 찾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복종케 하고 충실한 혹은 ‘협력적인’ 대상으로 감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현지인들 중 언어 능력이 우수한 자를 통역자로 교육, 훈련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맡겼다. 동시에 모국어가 지배자의 언어인 사람을 통역자로 양성하는 양방향 언어의 매개 시스템도 구축했다. 당시 통역자가 현지인에게는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타자로 인식된 것은 식민 지배자가 끼친 영향이 이질적인 것의 일방적 침입임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국주의가 언어를 매개로 이질적인 문화를 일방적으로 규범화한 과정이 드러난다. 지배자의 언어가 계몽이라는 부가가치를 지닌 고차원적 언어로 교육되거나, 혹은 지식, 포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침입하여 언어적 지배 구조를 식민지 문화 속에 형성한 것이다. --- p.24
탈식민주의 이론을 경유한 번역론은 유럽 중심주의 역사를 언어적 측면에서 다시 읽고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쓰는 행위가 되었다. 이에 따라 번역의 기능 또한 크게 변화한다. 다른 문화와의 콘택트 존에서 혼종적 언어 공간을 구축하고, 그곳에서 자신과 타자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번역론은 고정화된 타자의 표상을 해체하는 동시에 주체 또한 재고하는 시점을 형성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역은 항상 언어의 개입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 p.35
번역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제3의 공간은 번역의 기점언어와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제3의 공간은 오히려 번역과 교섭의 양극, 곧 간극에 다중의 의미가 기입되는 혼종성의 공간이다. --- p.41
번역은 따라서 타 문화를 가시화하여 그곳에서 독자가 문화적 타자를 발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연속의 미학을 강조하는 저항 전략으로서 번역 방법론은 번역을 통해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하는지를 보여주며, 연결 불가능한 문화 간의 거리를 환기시켜 차이와 타자성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적 타자 발견’과 ‘저항적 번역’을 통해 ‘차이와 타자성’을 드러내는 행위는 탈식민주의 비평의 핵심 키워드가 된다. 이러한 번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번역자는 불가시적 존재가 아니라 비판적 시야와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번역자에게 이중의 읽기(double reading)가 결정적 자질로 요구된다. --- p.51
현대에 이르러 번역 불가능성을 내포한 본질적인 다중성과 문화 비평으로서 번역의 역할은 여러 이론들을 통해 검토되었다. 번역은 유럽 중심주의 헤게모니를 붕괴시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한편, 언어 중심주의적 지식을 핵심으로 삼기에 중립적이지 않으며 서구적 사고의 틀에 맞춰진 한계도 노정한다. 이러한 문제성으로 인해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다양성을 갱신하는 역동성이 번역론의 중요한 특징으로 주목받는다. --- p.65
번역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번역을 텍스트로 분석하여 언어와 의미의 관계가 사회적 요인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번역을 정치·문화·사회적 위치에서 파악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문학 번역에서 문화 규범이 작용하는 번역 언어의 특징과 법칙을 고려한 수평 방향의 좌표축이 상정된다. 후자는 정치·역사적 배경 아래 번역의 역할과 정치·역사적 역학과의 관계를 현재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수직 방향의 좌표축을 설정할 수 있다. --- p.66
다른 사건과 달리 시간의 간극을 가진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그 특이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한 대상이다. 언어 외부, 사고 외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존재와 부재의 이중성이라는 패러독스 속에서 흔적으로만 파악된다. 홀로코스트 서사는 그러한 패러독스 속에서 증언, 자서전, 문학으로 전개되었다.
이글스턴은 홀로코스트 담론이 응답 불가능한 질문으로 종결된다고 말한다. 그 질문은 홀로코스트의 영향이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하며 계속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 p.137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자신과 타자의 번역 사이에 있으며 자신의 안과 밖 모두에 있다. 리쾨르에 따르면 그 주체성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말해지며 들려온 이야기의 조직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서사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
칠 때, 번역과 정체성의 유비적 관계가 드러날 것이다. 독자에 의한 비평적 ‘재번역’이 또 하나의 번역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 리쾨르의 번역론은, 이 지점에서 독자는 번역자 번역 행위의 동반자라는 점을 시사한다. --- p.235
다수의 세계문학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번역문학이라는 사실은 세계문학이 목표언어의 영역에서 유통을 위해 언어적 변화를 겪게 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타자성에 관한 논의를 돌이켜볼 때, 이는 타문화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원작의 독자성, 그중에서도 문체를 상실하는 시련을 의미한다. --- p.238
번역을 검토하는 작업은 주체의 ‘재번역’이며 그 의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언어이다. 역사 다시 읽기/쓰기로서의 번역 개념은 이와 같은 번역론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과정에 해체 이론과 결합하여 무한의 ‘다시 읽기’는 텍스트를 존속시키는 번역의 본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상호텍스트성 층위에서 번역 텍스트를 개입시킨다. 이를 통해 텍스트의 ‘기원’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도입되었으며 애초에 다층적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