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는 봄베이에 도착한 첫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운명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운 좋게도 나는 카를라 사라넨을 만나는 카드를 뽑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본 순간부터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른 많은 이야기처럼 한 여자와 한 도시, 그리고 약간의 행운으로부터 시작된다. 봄베이에 도착한 첫날, 내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냄새가 다른 공기였다. --- p.7
나는 가방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마개를 땄다. 그건 뉴질랜드의 한 친구와 약속한 또 다른 의식이었다. 그녀는 위조 여권으로 인도까지 무사히 밀입국하면, 한잔하면서 자기 생각을 해달라고 했다. 대마초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이 작은 의식이 내게는 중요했다. 탈옥하고 가족을 잃은 것처럼, 그동안 사귀던 친구들도 전부 잃었다. 그리고 이젠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희망도 없이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놈이었다. 내 인생은 모두 내가 가진 추억과 부적과 사랑의 증표에 머물러 있었다. --- p.25
굶주린 아이들, 죽은 아이들, 노예들. 얘기를 마치는 프라바커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경험보다 더 깊은 진실이 있다. 우리가 볼 수도, 심지어 느낄 수도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다. 단순히 똑똑한 것과는 구분되는 심오한 진실, 지각과 구분되는 실재라는 진실이 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진실과 마주했을 때 무기력하다. 진실을 아는 대가는 마치 사랑을 아는 대가처럼, 때로는 그 어떤 마음으로도 쉽게 막아낼 수 없을 만큼 클 때가 있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증오하는 것은 막아 준다. 그리고 그런 진실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것을 전하는 것뿐이다. 프라바커가 내게 말해 준 것처럼, 내가 지금 여러분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 p.111
스탠딩 바바들은 앞으로 남은 일평생 절대 다시는 앉거나 눕지 않을 것을 맹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밤낮없이 평생 서서 지낸다. 밥도 서서 먹고 일도 서서 본다. 서서 기도하고, 서서 일하고, 심지어 잠도 서서 잔다. 다리로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지만, 의식이 없을 때는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에 몸을 묶는다. --- p.201
아이들이 한 잔 가득 담긴 물과 이빨 빠진 컵에 차를 담아 내왔다. 압둘라는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란지트는 고개를 뒤로 기울였고, 아이 하나가 그의 목구멍 속으로 콸콸 물을 쏟아 부었다. 나는 이 그로테스크한 메스꺼운 광경에 두려워하며 머뭇거렸다. 빈민촌에서는 나환자를 지칭하는 말로‘ 죽지 않는 자’라는 뜻의 힌디어를 쓴다. 나는 죽지 않는 자의 악몽을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손에 든 물 한 잔 속에 세상의 모든 질병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 p.279
“이런 식으로 정의는 완성된다네.” 그날 밤 카심 알리는 나무 색깔 눈빛으로 두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왜냐하면, 정의는 공정함과 용서, 둘 다로부터의 판결이기 때문이네. 정의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네. 심지어 우리한테 상처를 입혀 처벌을 받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말일세. 우리가 이 두 소년한테 내린 결정을 통해, 자네는 정의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벌주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네. 잘못한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방식 또한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네.” --- p.304
감방 네 개와 복도는 겨우 마흔 명 정도 수용 가능한 넓이였다. 하지만, 첫날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갇혀 있는 사람들이 240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하나의 벌집, 하나의 개미굴, 서로 다닥다닥 붙어 팔다리 한번 꼼지락거리기도 어려운, 꿈틀거리는 거대한 하나의 인간 덩어리 그 자체였다. 변소에는 똥물이 발목 높이까지 차올랐다. 소변기에는 오줌이 가득 넘쳤다. 그 악취 나는 늪은 복도 맞은편까지 질질 흘러넘쳤다. 우기의 습기 많은 눅눅한 공기가 여전한 감방 안은 점점 미쳐가는 수감자들이 두어 시간마다 한 번씩 토해 내는 신음하는 소리, 중얼대는 소리, 소곤대는 소리, 불평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 p.536
나는 한밤중에 등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앉아 등을 긁는데, 작은 압정 크기만 한 벌레 한 마리가 등에 붙어 있는 것을 알았다. 떼어 내어 돌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거의 동그랄 정도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짙은 회색 몸통에 다리가 수십 개 달린 생명체였다. 손으로 짓눌렀다. 피가 툭 터져 나왔다. 바로 내 피였다. 놈은 내가 자는 동안 내 몸에서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동시에 역겨운 악취도 풍겼다. 아서 로드 감옥에서 죄수들의 재앙으로 알려진 카드말이라는 기생충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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