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란, 한 마디로 자연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을 마치 인간처럼 어떤 욕망과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기에, 그와 같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연에는 필연성만 있을 뿐 어떤 목적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신의 속성과 일치한다. 결국 선악이라는 개념도 신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했을 따름이다.--- p.14
기독교도의 계율에 대해 말하자면 원본은 온데간데없고 사본들만 그것도 이것저것 제각각인 문헌에 근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초자연적인 내용들, 즉 불가능한 현상들만 그득할 뿐인 그 책에서는 선행과 악행에 대해 돌아온다는 보상과 징벌도 오로지 내세와 관련된 것이어서, 이승에서는 그 기만(欺瞞)이 폭로될 리 없게끔 해놓았다. 이미 저세상으로 간 사람이 사실 여부를 전달해주러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p.57
신성과 직접 교류한다는 명목 아래, 그는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무한한 복종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제아무리 유능한 통치자였다 해도 완전한 복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력을 동반하지 않은 속임수가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실제로 그가 교묘히 복속(服屬)하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엔, 그의 가식을 알아볼 만큼 깨어 있고, 정의와 평등의 번드레한 허울 너머 그가 권세와 잇속을 챙긴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던질 만큼 용기 있는 자들도 있긴 했다. 요컨대 절대권자의 권위라는 것이 혈통의 문제인 만큼, 그걸 참칭(僭稱)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주장 말이다. 요컨대 모세는 종족의 아버지가 아니라 압제자일 뿐이라는 얘기다.--- p.73
예수 그리스도가 철학자나 지식인들을 자기 사도로 절대 임명하지 않은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내세우는 계율이 보편적 양식(良識)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여러 군데에서 학자들을 노골적으로 탄핵했고, 자신이 말하는 왕국으로부터 배척했으며, 오로지 지력이 박약한 자들과 단순한 사람들, 어리석은 자들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p.93
예수 그리스도를 논할 때, 일반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그만의 독특한 윤리에는 두 가지 문제가 눈에 띈다. 하나는, 그의 윤리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자연에 반하는 사항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느니,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사악한 자들에게 저항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자기 제자들과 추종자들같은 거지와 떠돌이들이 무사히 연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윤리가 아니냐는 점이다. 실제로 그 속에는 부자들의 인색함에 대한 저주가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p.96
세상 여러 종교들은 서로 다른 점 또한 여럿 가지고 있다. 각자 고유한 조항들을 갖추고 있고, 그것들을 통해 서로를 구분하는 가운데, 서로 더 잘나고 서로 더 진짜임을 내세우면서, 트집을 잡아 비난하고 결국은 상대를 무조건 단죄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p.141
실제로 유대인들이 제멋대로 인용하는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모든 악행을 저지른다(in nomine Domini committitur omne malum)”라는 속담이야말로, 교황 레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상대로* 내뱉었다는 다음의 비난 발언 못지않게 진실이다. “지금은 제각각 자기 탐욕에 맞추어 종교를 끌어다 사적인 일들을 마구잡이로 처리하고 있다.”--- p.176
신은 극히 단순한 존재이거나 무한정한 외연(外延) 자체로서 자신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과 닮아 있다. 말하자면 그냥 물질 자체가 되겠는데, 결코 정의롭지도 자비롭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질투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결론적으로 벌을 내리는 존재도, 보상을 해주는 존재도 아니다.--- p.182
신이 보기에 아름답되 추하지 않으며, 선하되 악하지 않으며, 완전하되 불완전하지 않은 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 신은 항상 칭송받길 원하고, 기도와 사랑, 흠모의 대상이길 바라며, 인간의 말과 행위에 반응해 사랑과 증오를 느끼는가 하면, 요컨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을 더 많이 염두에 두신다는 발상. 이런 모든 변별적인 사고는 오로지 협소한 정신력이 만들어낸 순전한 상상일 뿐 그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무지가 그런 것들을 만들어냈고, 이기심이 그것을 부추길 따름이다.--- p.183
자신의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혼이든 신이든 악마든 결코 보통 사람들이 떠드는 식으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거창한 단어들은 하나같이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겁을 주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p.184
악마와 지옥에 대해 말하면서 정말로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신이란 전능하고 신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거라면, 악마가 신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신의 친구들을 앗아가 버리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일들에 신이 동의를 한 것일까, 아닐까? 만약 동의를 한 거라면, 악마는 신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악마가 무엇을 행해도 신이 원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기에, 결국 신을 저주한 건 악마가 아니라 신 자신이며 단지 악마의 입을 빌렸을 뿐일 텐데, 정말이지 내 생각엔 얼토당토않은 얘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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