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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지식in 사전

세계사 지식in 사전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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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462g | 128*188*30mm
ISBN13 9788994054117
ISBN10 899405411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조병일
서울대 중문과와 동 대학원 중문과를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는 『모택동 전기』(공저), 『세계사 오류 사전』이 있고, 『중국 어업 협정 관련 법전』을 번역했다.
저자 : 이종완
고려대 노문과를 졸업했다. 주간신문사 취재 기자를 거쳐 현재는 세계사 관련 저서의 기획 및 저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세계사 오류 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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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와 피사로 등이 활약하던 대항해 시대이다. 그 후 감자는 가난한 계층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보급되어 18세기 인구 증가에 공헌한 일등 식품이 되었다. 기아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감자 재배는 소농민이나 농촌 하층민의 경제적인 자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7세기 영국의 식민지 아래 있던 아일랜드 농민에게도 감자는 매우 중요한 식품이었다. 아일랜드 농민들은 밀가루를 원했지만, 밭에서 자라는 밀은 언제나 영국인 지주들의 몫이었다. 경작지가 없는 가난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칼로리가 높은 감자를 경작하여 굶주림을 해결했다.
아일랜드 인구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으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730년에 약 150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1백여 년 뒤에는 놀랍게도 85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1845년 아일랜드에서 근래 보기 드문 대기근이 발생했다. 밀은 풍작을 이루었고 목축업도 전혀 피해가 없었지만, 유독 감자만이 대흉작이었다. 아일랜드 동부 지역에서 감자의 줄기마름병이 생긴 것이다. 이 줄기마름병은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었고, 영국 크롬웰의 침략 이후 감자에만 의존하며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했던 아일랜드 농민들은 살아갈 방도를 잃어버렸다. 그 무렵 1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고, 2백만 명 이상이 아일랜드를 떠났다. 이때 고향을 떠난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사회에서 주요 민족 가운데 하나인 아일랜드계는 이처럼 감자의 대기근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감자는 고향을 떠난 아일랜드 사람들과 함께 다시 북미 대륙으로 전해졌다. 남미 안데스가 원산지인 감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북미 대륙에는 전해지지 않던 농작물이었다. 남미 대륙의 감자는 이렇듯 멀리 유럽으로 건너가 수세기 동안 한몫을 한 뒤 다시 북미 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다.---pp.20-22

유럽의 지배자가 된 나폴레옹은 1808년, 대군을 이끌고 인접국인 스페인을 점령했다. 그 해 5월 2일, 프랑스군의 만행에 견디다 못한 마드리드 시민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폭동은 곧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 보복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무기를 소지하고 체포된 사람은 군사재판 후 즉시 처형되었고, 마드리드 폭동 후 8명 이상의 집회는 금지되었다.
이 사건 이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앉혔다. 이를 보다 못한 스페인 청년들이 전국에서 무기를 들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프랑스군과 소위 ‘작은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전쟁’이란 스페인어 ‘게릴라(guerilla)’를 뜻하는 말이다.
마드리드의 저항은 곧 스페인 전역에 퍼졌고, 스페인의 민중 봉기도 점차 확산되었다. 그 해 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한 나폴레옹은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정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정규전과 달리 언제 어디서 스페인의 게릴라 부대가 출몰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늘 골치를 앓았다. 결국 프랑스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페인 게릴라 부대는 영국군과 함께 1813년에 프랑스군을 내몰았다. 훗날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게릴라 부대를 가리켜 ‘스페인의 궤양(潰瘍)이 나를 파괴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작은 전쟁’을 뜻하는 게릴라라는 말은 이 같은 스페인의 저항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부터 고유명사로 정착되었다.---pp.26-28

고대 중국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이 고급 관리가 되는 길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이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고대에는 아직 학문이 민간에 보급되지 않아 과거 응시자 수도 후대만큼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후의 진사시험 급제자는 백 명에 한두 명 꼴에 지나지 않았다. 송(宋)대에 들어서면서 과거 급제자 수가 많아지는데, 과거의 응시하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여 대기하는 사람의 수가 항상 6-7천 명에 이르고 시험 시기가 되면 그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과거 시험장에서도 커닝이 성행하였다. 응시자들은 1만 개가 넘는 방에 따로 감금된 채 주어진 주제에 대해 3일 간에 걸쳐 논문을 작성했다. 응시자들이 과거장에 들어설 때는 커닝을 방지하기 위해 문에서 두 차례에 걸친 엄격한 신체검사와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부정한 물건을 지니고 있는 응시자를 적발한 병사에게는 은 3냥의 포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응시자들의 커닝 수법도 다양해서 이를 적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한 예로 응시자는 속옷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본문과 주석을 빽빽이 적어 넣기도 했다. 이들은 일단 시험장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커닝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의 시험은 독방에서 홀로 치러졌기 때문에 시험관에게 들키지 않고 커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붓 뚜껑 안에 예상 답안지를 몰래 적어가서 커닝하는가 하면, 대리시험도 있었고, 채점관이 뇌물을 받고 부정 합격시킨 사례도 있었다. 과거 시험은 워낙 장기간에 걸쳐 치러졌으므로 여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응시자는 몇 십 년 간 공부에만 전념해야 했으므로 집안이 넉넉하지 않으면 도중하차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채점하는 관료들이 많은 수험자들의 답안지를 짧은 시간 안에 채점하다 보니 우수한 문장가를 놓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pp.40-42

유럽인들은 1582년 10월 5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깜짝 놀랐다. 달력에 있던 열흘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10월 4일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달력은 10월 15일로 변해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1582년 전까지만 해도 대개의 유럽 국가는 율리우스력(歷)을 사용하고 있었다. 율리우스력이란 기원전 46년에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에게 역법의 연구를 명령하여 이집트력을 모델로 한 ‘태양력’이다. 이 역법은 1년을 365일과 매년 생기는 6시간의 오차를 조정하기 위해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이 역은 개정자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 불렸다.
그런데 이 율리우스력은 이전의 역법에 비해 매우 정확했음에도 불구하고 1천 년에 8일의 오차가 생겼다. 이 오차를 조정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새로운 역법을 도입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그레고리력이다.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초기에는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었는데, 율리우스력에서는 오랫동안 누적된 역법상의 오차로 원래는 3월 21일이어야 할 춘분이 달력에서는 3월 11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 춘분은 기독교에서 부활절을 정할 때 기준이 되는 날이었으므로, 이 10일간의 오차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교황은 각 교회와 의논한 끝에 1582년 10월 4일 다음날을 10월 15일로 한다는 새 역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날짜 변경은 많은 유럽의 국가에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은 교황이 자신들의 삶에서 시간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해 사라진 10일을 되찾기 위해 폭동까지 일으켰다.
물론 고립된 시골 마을에 살던 농부들은 이런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몇 해 동안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서 엄청난 혼란이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신의 뜻’을 앞세워 밀고 나갔다. 그에게는 새로운 달력을 강행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점점 번창하는 신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권력 기반의 강화가 필요했고, 새로운 역법은 교황의 힘을 집중시켰다. 가톨릭 국가들은 즉각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지만 신교국은 이를 외면했다. 영국은 1752년까지, 러시아 등 동방정교 국가들은 20세기 초반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pp.43-45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지 꼭 10년이 되던 해였다. 초기 기독교는 아직 민중의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한 종파로 마술을 일삼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로마 대화재 이후 체포된 방화범들 중에는 광신적인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 ‘방화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이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박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기독교 박해는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신자에게만 국한했고 또 단 한 차례로 끝났다.
사실 네로 황제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 박해와는 관련이 없고 그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왜곡되어 왔다. 네로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원로원 출신의 타키투스는 네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네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네로가 포악한 황제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유럽에서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 신자들을 학살했던 사실은 네로의 평가에서 문제로 삼지도 않았다. 네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던 독일의 작가 반덴베르크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은 4세기가 되어서야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이야기도 이때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행하게도 거기에 말려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네로를 기독교 박해의 원흉으로 몬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적 신빙성이 빈약한 야사와 같은 사료들을 기본으로, 로마제국 말기부터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네로를 악마처럼 취급해 오고 있는 것이다.---pp.57-58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로 이어지면서 4층까지 완성됐다. 콜로세움은 세 황제를 거치기는 했지만 건축 기간은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간결한 설계와 뛰어난 시공 기술, 수많은 노예 노동력 덕택이다. 이런 짧은 공사 기간은 불가사의한 일로, 오늘날의 기술로도 이 정도 규모라면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고대 로마 권력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고,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웬만한 도시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도 관중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는 15분이 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의 시합과 맹수들의 서커스 등이 펼쳐져 로마 시민들의 오락장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경기장은 직경의 긴 쪽은 188미터, 짧은 쪽은 156미터에 달하며 둘레는 527미터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미터의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콜로세움이 최초의 돔구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구경꾼들을 궂은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천막인 벨라리움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4층에 나무 봉을 매달아 천막으로 하늘을 덮어 돔구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콜로세움은 칸마다 창문 위에 천막을 치는 데 쓰이는 꽂을대 용도의 돌이 세 개씩 튀어나와 있다. 이 꽂을대의 나무 깃대를 꽂아 삼각 돛 모양의 천막으로 하늘을 가렸다. 천막을 치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으므로 나폴리 만의 미세눔 해군기지에서 파견된 특수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작업을 담당했다.---pp.78-80

많은 사람들이 「동방견문록」의 저자는 마르코 폴로라고 알고 있으나, 원저자는 루스티켈로(Rustichello)이다. 1290년 중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방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도리어 그를 허풍쟁이로 몰았다. 그러던 중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서 수감자들의 유일한 낙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고 또 듣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중국 원나라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같은 수감자들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어느새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되었고, 누군가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루스티켈로도 있었는데, 그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좀 과장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몽골제국에 있었다고 했는데, 만리장성이나 당시 중국의 진귀한 관습 중의 하나인 여성의 전족(纏足), 중국의 연중행사, 한자의 구조 등의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훗날 역사학자들은 과연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갔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pp.83-84

영국의 런던탑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국왕을 배신한 자를 가차없이 처벌하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중세 시대 이곳에서 자행되던 처형 방법은 실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1483년 리처드 3세가 어린 조카들인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을 이곳에 가두었다가 비밀리에 죽였다. 이 탑의 반대편 템스 강 쪽에는 유명한 처형자의 문(Traitors Gate)이 있고 내성으로 들어서면 화이트 타워(White Tower)와 헨리 8세의 2명에 부인인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잔디밭이 있다. 추기경 토머스 월시는 이곳에 유폐되자 헨리 8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정도로 고문 수법이 잔혹했다. 월시의 편지는 지금도 런던탑에 전시되어 있다.
런던탑 마당에는 이 탑의 귀하신 몸인 까마귀가 있는데, 찰스 2세 때부터 이 탑에는 희한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가 사라지게 되면 탑이 붕괴되고 영국도 멸망해 버린다.”
이런 전설을 믿고 있었던 찰스 2세는 런던탑에 있는 까마귀들이 제국의 몰락을 지켜주는 성조(聖鳥)로 여겼다. 그래서 까마귀들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라 죽을 때까지 런던탑에 살게 했다. 까마귀들은 오래도록 런던탑에서 ‘행운의 심벌’로 살아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폭격에 놀라 그만 모두 죽고 말았다. 현재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들은 2차 대전이 ?난 후 영국 정부가 1946년에 다시 풀어놓은 것이다.
성 안에는 항상 6마리 이상의 큰 까마귀가 사육되고 있으며, 날개 잘린 큰 까마귀를 돌보는 것도 관리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영국 정부는 런던탑의 까마귀가 죽으면 새로운 까마귀를 다시 탑으로 들려와 살게 해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pp.100-102

베르사유 궁의 주인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절대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발레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정작 자신도 17세기의 유명한 무용수이기도 했다.
루이 14세가 발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세 때, 왕위에 즉위하면서부터였다. 5세에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깨달은 루이 14세는 매일 무용 수업을 받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무용 연습을 했다. 그 뒤 정식으로 궁정 무용을 통해 발레를 배운 그는 1656년에는 2개월 동안 무려 7편의 가면극과 발레에 출연하기도 했다. 1670년 무용을 그만두기까지 루이 14세는 무려 26편의 발레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발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이기도 했다. 그는 베르사유에 호화찬란한 대궁전을 짓고 귀족과 왕족들을 불러들여 매일 사치스러운 연회와 공연을 열었다. 그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귀족과 왕족들을 유흥에 빠지게 하고 왕의 절대적 힘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이 무도회를 열었다. 귀족들에게는 사치와 낭비에 젖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은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pp.106-107

수녀원은 본래 신앙생활을 원하는 여성들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유럽의 수녀원은 여성들의 은둔 장소 혹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가난해서 생계를 이을 수 없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처녀, 혼기 놓친 노처녀, 남편 잃은 과부 등 수녀원에 모여드는 여성들은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카타리나도 그중 하나였다. 작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카타리나는 열 살 때 새어머니를 맞은 다음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수녀원은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녀의 탈출을 돕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루터는 어느 날 밤 무려 열두 명의 수녀들을 마차에 태워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열두 명의 수녀 가운데 세 명은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여덟 명을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수녀 카타리나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다.
카타리나는 남편의 신앙심 깊은 ‘영적 동료’로서 남편에게 협조하고 위안을 주는 충실한 아내였다. 그는 집안을 따스하게 가꾸고 루터가 좋아하는 포도주와 맥주를 항상 빚어 놓았으며, 딸 셋 아들 셋을 낳아 키웠다. 그중 딸 둘은 어려서 죽었다. 루터 역시 아내 카타리나를 사랑했다. 루터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여겼는지는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거룩한 결혼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귀한 보물이다. 경건하고 쾌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잘 관리하는 아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의 모범이요, 두 사람이 일군 가정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가장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루터가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둘러싸고 성탄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꼽고 있다.---pp.111-112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쇄기를 발명하자마자, 곧바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나섰다. ‘면죄부’는 가장 구미가 돋는 ‘상품’이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종교개혁이나 사회변혁 이념과는 상관없이 철저히 이익 창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면죄부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구텐베르크는 이번에는 성서 출판에 손을 댄다. 당시 성서 출판은 니콜라우스가 10년 동안 주창해 온 개혁 사업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1455년에 발간된 금속활자본 라틴어 성서의 가격은 800플로린이었다. 하위 성직자의 3년 급여와 맞먹었지만 베끼는 데만 5년에서 20년이 걸리는 필사본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성서의 성공적인 인쇄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는 큰돈을 벌지 못했다. 결국 재정난과 소송까지 당해 인쇄 기술과 장비를 자본주인 푸스트에게 넘겨야 했다.
구텐베르크 사후 활판 인쇄술은 빠르게 전파돼 1500년에는 260개 도시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며 지식 혁명을 낳았다.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그의 인쇄술 덕분이었다. 성서의 번역 활자본이 나오면서 문맹과 맹목적인 복종이 사라지고 지식 독점구조가 깨졌다.---pp.131-134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 작품인 모세상(像)을 보면 머리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세 예술가들은 모세를 그릴 때 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왜 모세의 머리에 뿔을 그려 넣은 것일까?
이것은 성서 번역에서 찾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분노하고 있으나 매우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광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garan 혹은 karon인데,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horn(뿔)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것이다. 뿔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geren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구약을 번역한 불게이트는 이 부분을 ‘그 얼굴에 뿔이 돋아나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본래 의미에 적합하지 않아서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뿔’을 뜻하는 히브리어에는 ‘광채’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동물의 뿔은 공격과 방어 무기로 사용되어 물리적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뿔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신적 존재는 힘의 상징인 뿔을 끼워 넣은 관으로 장식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권력가들은 자신의 초상을 이마에 뿔이 있는 모습으로 메달이나 동전에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 더군다나 구약성서에서 황소 뿔은 하느님의 힘이나 왕이 백성들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되었다.---pp.138-139

고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바빌로니아의 상징물은 바벨탑이다.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은 이를 ‘바빌론’이라 불렀으며, 바빌론 시에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방을 ‘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폴리스를 평정한 후 그리스인 병사를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서 기원전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는 원정에 참가한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기 위해 제국 내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동방에 전파하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민족의 통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토착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인류 최초의 세계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런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염원 중의 하나는 ‘바벨탑’의 재건이었다.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재건하여 동방 문화를 흡수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바벨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기 150여 년 전인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하자마자 곧 폐허가 된 바벨탑 재건 착수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바벨탑 재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세계를 정복하는 일보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이 더욱 거창한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벨탑 재건 사업에 1만여 명의 인원을 2개월간 투입한 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바벨탑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문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하고 있다. 바벨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의 마르두크 신전에는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pp.163-164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성공회를 확립하게 된 배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8세는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와 정치적인 이유(형수 캐서린이 에스파냐의 공주)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메리라는 딸을 얻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아내 캐서린을 멀리하고 시녀인 앤 불린을 더 사랑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캐서린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가톨릭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p.194

고대 시대는 화폐의 가치 용도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화폐의 대용 가치로 이용해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쌀, 보리, 밀 등의 곡식 화폐, 즉 ‘곡화(穀貨)’였다. 곡화 다음으로 화폐로 사용했던 것이 소금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소금은 얻기가 매우 힘든 것이어서 소금의 생산과 분배 문제는 일찍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특히 통치자들은 소금을 국가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국가 재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백성을 통제했다.
소금의 화폐 가치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왕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노동의 대가로서 소금을 지불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소금을 살 수 있는 특별 ‘수당’을 지급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살라리움(salarium)이라고 한다. 급료나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의 ‘샐러리(salary)’는 살라리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병사를 의미하는 솔저(soldier)의 어원 역시 소금인 솔트(salt)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마 제정시대 때부터 급료를 돈으로 지급했지만, 이를 여전히 살라리움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의 제염소가 있는 테베르 강 하구의 마을은 귀중한 소금을 적의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병사가 배치되고 그 급여의 일부가 소금으로 지급되었다.---pp.202-203

십자군 전쟁은 ‘성지 탈환’이란 명분으로 약 2백 년간 계속되었다. 8차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특이한 집단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매춘부들이다. 제1차 십자군(1096-1099년)에 종군했던 매춘부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 알브레이트 1세가 신성로마황제로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입성했을 때(1298년)는 8백여 명의 매춘부가 동행했으며, 스페인 알바공의 네덜란드 원정 때는 4백여 명의 기마 매춘부와 8백여 명의 도보 매춘부가 참가했다.
이들 매춘부는 연대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와 마찬가지로 급료를 받는 용병이었다. 이들을 참가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욕구불만을 위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십자군 병사가 외국 여자에게 성병을 옮거나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전쟁에 나선 병사들이 요염한 여자들이 있으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pp.221-222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기념물로 세워졌다. 에펠탑이 처음 파리에 세워졌을 때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프랑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관광 코스 중의 하나지만, 당시에 이 에펠탑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파리의 밤을 밝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은커녕 ‘쓸모없고 괴기스러운 건축물’ ‘파리의 배꼽에 박힌 등대’ ‘거대하고 흉측한 해골’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애초에 에펠탑은 20년 동안만 그 자리에 있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리의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20년도 너무 길다면서 조속히 철거해야 한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섰다.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파리 당국은 계속되는 불평과 비난을 고려해 건립 20년이 완료되면 에펠탑을 해체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라디오가 발명되고 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수천 피트 높이의 에펠탑이 전파를 송출하는 데 필요한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프랑스 정부는 에펠탑을 해체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즉 라디오가 에펠탑을 살려낸 셈이다. 에펠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TV가 발명된 이후에는 TV 송신탑으로 이용했다.---pp.244-245

그리스에서는 붉은 빛의 와인은 ‘포도주의 신’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디오니소스의 ‘피’인 와인을 마시면 이듬해에 풍작을 약속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와인은 포도 열매가 완전히 짓이겨진 후 와인으로 소생한다는 점에서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술로 불려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이 디오니소스 신전인 나이온에 모여 포도에서 와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체험하고 밤새도록 와인을 즐겼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원래 와인을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그리스로부터 포도 재배가 전해진 로마는 피정복 지역에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적극 장려했다. 이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포도 재배가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로마에서 와인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21년이다. 초기 로마에서는 여성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다. 그 이유는 자녀를 낳는 어머니인 여성이 ‘와인’이라는 이질적인 피를 마시는 것은 부정행위나 마찬가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와인이 매우 고가품으로 애용되었으며, 제정기가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진 여성도 이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393년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에서는 와인이 예수의 거룩한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미사에 이용되었다. 마치 포도즙이 와인으로 바뀌듯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pp.260-261

이발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해 있었다. 영어에서 이발사를 ‘바버(barber)’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염을 의미하는 라틴어 ‘바루바(barba)’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칼날을 취급하는 면도사가 외과의사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과의학이라는 별도의 학문 분야가 없었다. 외과의사는 이발사를 겸하는 천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면도를 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깎고, 피를 빼내는 일을 했으며, 종기도 째고 고름을 짜내는 등 외과의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중세 시대에는 진통제도 마취약도 없었으므로, 외과수술은 고문보다도 훨씬 끔찍하였다. 환자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후 외과의사(이발사)는 톱, 망치 등을 써서 무지막지하게 수술한 후, 빨갛게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을 하였다. 수술 도중 환자가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이발소의 앞에는 빨강, 파랑, 하양의 3색 나선상 간판이 있는데, 이것은 빨강이 동맥, 파랑이 정맥, 하양이 붕대를 의미한다. 급한 응급 환자가 다쳤을 경우 병원(이발소)의 위치가 눈에 잘 들어오도록 세 가지 색을 가진 간판을 내건 것이다. 그 간판이 바로 삼색등의 시초이다.
외과의학이 천한 직업에서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파레(Ambroise Pare)의 공이 컸다.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파레는 여러 이발소들을 전전하면서 외과 의술을 배웠고, 파리에서 공부한 후 정식으로 외과의사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프랑수아 1세는 주변국과 잦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파레는 군에 종군하는 군의가 되어 전쟁 때마다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또한 그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치료법을 개발했다. 인두로 지져서 상처를 지혈하는 난폭한 방법 대신에 새로운 지혈법을 개발했으며, 처음으로 틀니, 의안, 의족 등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분리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후 이발사는 수염과 머리만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발사의 주 업무가 수염을 깎는 것으로부터 머리를 깎는 것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안전 면도기가 출현한 20세기 이후부터이다.---pp.262-264

중세 대학은 그리스 로마 문명 쇠퇴 후 지적 생활을 부활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은 길드란 뜻으로, 원래 ‘전체’라는 의미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교육을 위한 길드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전반기의 학문과 교육의 중심은 수도원이었다. 대학은 12세기 이후 수도원의 부속학교(Schola)로서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 중세 대학의 교육 과정은 7개 자유교과목으로, 초기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을 꼽을 수 있다. 파리 대학은 교수 조합,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으로 이루어져 다른 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볼로냐 학생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과 협조를 위해 조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이 교칙 및 학과목을 정하고 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교수들이 수업료만큼의 강의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조직을 만들었고, 방세 및 식비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중세 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조합(길드)을 만들어 하숙비나 학비 인하를 학교 측과 교섭하기도 했다. 그들은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 수단은 집단적인 수업 포기, 곧 ‘등교 거부’였다. 당시의 대학에서 교수는 학생 집단이 내는 수업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 거부는 교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pp.31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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