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때문에 하여간 내가 못 살아! 너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죽지……. 너, 아주 엄마를 돌아 버리게 만들 속셈이니? 너 때문에 엄마가 미친다 미쳐……. 어쩌면 너는 왜 애가 그러냐! 도대체 이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기에, 이렇게 엄마 속을 썩히냐……. 아유~ 차라리 그때 이걸 그냥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식이 아니라 아주 웬수야, 웬수 덩어리야!” 아이가 세상을 모르고 세상에 접촉하지 않은 채 요람에 누워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요람을 박차고 세상 속으로 나오면서 아이는 누구든 조금씩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들과의 치열한 아귀다툼의 경쟁에서 때때로 밀리기도 하는 법이다. 어찌 내 아이가 항상 남들보다 더 잘하고, 엄마가 보기에 눈꼽만큼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저 엄마의 기대에 척척 들어맞게끔 행동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문제를 좀 일으켰다고 해서, 남들보다 좀 쳐진다고 해서, 어찌 그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것까지 무시당하고 거부당하고 비난받아야만 하겠는가?
# 공부를 못하는 것에 더해서 자녀가 다른 일로 부모 속을 썩이기 시작하면, 부모들의 자녀 무시는 극에 달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부모들에게 우선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내가 교육학자라서 그런 것일까? 왜 아이가 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아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그동안 부모는 무엇을 했는가 하고 부모에게 먼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나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공부가 아니었을까? 그저 앞뒤 가림 없이 어려서부터 무조건 공부, 공부, 공부를 잘해야 한다, 1등 해야 된다 하면서 학원으로 낮밤 구별 없이 몰아세웠던 것은 아닌가! 그동안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따뜻한 대화와 설득을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해 왔는가? 세상에서 그릇된 모든 일에는 다 그만큼의 원인이 있는 법이다. 또 세상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은 다 그들만의 노력으로 점철된 깊은 고통의 삶이 그동안 있어 왔기 때문 아니던가.
#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존재가치를 무시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성 싶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녀는 부모에게 얼마나 큰 환희와 감동을 느끼게 해 주었던가? 그리고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얼마나 큰 기쁨을 부모에게 선사했던가? 누워있다 뒤집기 시작하면서, 그러다가 기고, 기다가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부모와 눈을 맞추고, 웃음을 짓고, 옹알거리고, 부모가 요구하는 대로 온갖 행동을 따라하면서 재롱을 펼 때 부모는 얼마나 가슴속에 깊은 희열과 기쁨을 느꼈었는가? 적어도 네다섯 살까지 아이들은 부모에게 그러한 기쁨의 원천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이‘세상’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부모에게 고뇌의 원천이 되고 분노의 근원이 되고 만다. 어찌 보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평생 하게 될 효도의 대부분을 세상에 태어나서 서너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부모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그러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자녀로 인한‘짐’이나‘부담’은 부모가 보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녀의 존재는 부모에게 엄청난 축복인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성싶다. 결국 자녀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에게 웬수 덩어리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동안 자녀들에게 쉽게(?) 내뱉었던 우리의 언어폭력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녀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자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들을 이제는 이렇게 한번 바꾸어 보면 어떨까?“넌, 우리 집의 보물이야!”“엄마는, 아빠는 너를 우리 집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단다.”“네가 있어 우린 정말 모두가 행복하다!”“그때, 그냥 저걸 낳았으니 망정이지. 그때 안 낳았더라면 어떻게 할 뻔 했수?”“너는 어디까지나 너야!”“남들이 뭐라고 하든, 너는 너 나름대로 하면 돼!”“엄마, 아빠는 이 세상에서 네가 최고라고 생각해!”“너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하고도 바꿀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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