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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라는 문장

그대라는 문장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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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2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64g | 128*188*30mm
ISBN13 9788990492944
ISBN10 899049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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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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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요「정읍사井邑詞」와 갑오동학농민혁명, 천년 고찰 내장사가 있는 정읍, 온화함과 반골의 기질이 뜨겁게 맞닿아 있는 정읍에서 나고 자랐다. 유년의 기억이 끊어진 필름처럼 부분 부분 잘려나갔다. 복기가 불가능하다. 그만큼 순탄치 못했다는 증거다. 고향 정읍엔 아픈 가족사가 있다, 라고 썼다가 화들짝 놀라 Delete 키를 누른다. 예상치 못했던 문장이다. 지워버리면 감쪽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삭제된 문장에 마음이 쓰여 글이 풀리지 않는다. 휑하니 남겨진 공백을 그럴듯한 수사로 둘러댈 자신이 없다. 우두커니 창밖을 응시한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에 가로수 잎잎이 무겁게 처져 있다. 내 살아온 날도 저렇듯 물기 가득 배인 세월이었으리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 여전히 아프다. --- pp.14-15, 「황홀한 업」

두 해가 훌쩍 흘러버린 이즈음 생각한다. 바라나시에 더 묵었어야 했다고, 1미터도 채 안 되는 미로와도 같은 골목을 소 돼지 말 양 오리 거위 원숭이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어슬렁거렸어야 했다고, 짜이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간절해지던 커피 생각을 지워냈어야 했고, 실려나가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집쥐 수시로 드나드는 2층 식당에서 한 끼 저녁쯤 게걸스럽게 해치웠어야 했다고, 넌덜머리가 날 만큼 고생도 해보고 배앓이 정도는 앓았어야 했다고, 아, 무엇보다도 나를 죽이는 내 안의 지독한 사랑을 불살랐어야 했다고, 그해 여름… 델리로 돌아오는 기차를 놓쳤어야 했다고. --- pp.37-38, 「델리행 기차를 놓쳤어야 했다」

배우 안석환 그가 최근 외도를 시도했다. 시대 부조리극〈대머리 여가수〉의 연출을 맡은 것이다. 소통이 절실한 이 시대에 연극을 통해서나마 은방울 소리 울리고 싶은 간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연극이 끝나고 배우가 퇴장하고 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질 테지. 로비엔 그를 기다리는 팬들이 웅성거릴 테고, 누군가는 수첩을 내밀어 사인을 청할 테다. 또 한 무리의 청년들은 돌아가며 사진을 찍기도 할 테고, 피곤한 내색 일절 없는 그…… 한 생애와 한 생애를 뜨겁게 포옹하며 등 두드려줄 테다.
그 남자의 포옹, 연기만큼이나 열정적이고 순정할 테다. --- p.76, 「그 남자의 포옹」

“나는 행운아야. 선택받은 삶이지. 난개발 이전의 제주를,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 없이 아름다운 제주를 사진에 담을 수 있었으니 말야.”
섬을 사랑하다 스스로 섬이 되어버린 김영갑,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내게 들려준 말이다. 목숨에 대한 열망도 체념도 신에 대한 분노도 없이 굳은 혀로 담담하고 평온하게 말하던 그, 그는 알까? 그를 만난 내가 얼마나 큰 행운아인지, 선택받은 삶인지. --- pp.106-107, 「두모악에 전하는 안부」

‘너 한 번이라도 사랑 때문에 미쳐보았니?’
나는 비겁했고, 무엇보다 정신이 늘 온전했다. 맹목적이지 못했다. 사랑인 척 굴었을 뿐 그 진위가 늘 모호했다. 뒤집어 생각한다. 지난 시절, 한 존재가 설혹 있었다면 그건 운명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의 거대한 토네이도가 아니었을 거라고,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하여, 시인한다. 그래, 아직 나는 미쳐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
이 대답이 정직한지 아닌지에 대해선 상호 함묵하기로 하자. --- p.133, 「난데없이 불쑥, 훅!」

내가 만나본 대추리 주민들은 어느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욕을 잘한다. 그것도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탁월하게 잘한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건 그들이 내뱉는 욕설이 심하면 심할수록 불쾌하기는커녕 쓸쓸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몰상식하다거나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슬퍼지고 만다는 것이다.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삼고 살아온 순박한 농부들이 오죽했으면 저럴까 싶으니 나도 덩달아 욕 몇 마디 보태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글줄이나 씁네 하고 끝까지 이성적인 말투를 고수하며 교양 있는 척, 고상한 척 구는 나 자신의 이중성에 넌덜머리가 나는 것이다.
--- pp.235-236, 「대추리에 가면 욕쟁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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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는 내 중학교 동창이다. 서로 그런지를 모르고 지내다가 작품을 쓰러 내려간 제주도의 한 콘도에 벽 하나를 두고 묵게 된 기회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만 그녀도 혼자 거기 있었고 나도 혼자 거기 있었던 터라 우리는 금세 서로를 곁에 두고 두세 시간씩 올레길을 걷곤 했다. 내 중학교 동창생 세실리아의 산문을 읽는 시간 내내 내 입술은 모로 찌그러졌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가 숙연해지는…… 갖은 모양새를 지었다. 틈틈이 내 입술이 아! 세실!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녀의 이 귀한 글들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풀꽃 한 송이도 거저 피는 법이 없다’예요, 라고 대답하겠다. 그녀의 글은 따뜻한 체온을 지닌 손바닥처럼 소외된 사람들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준다. 현실의 높은 벽들 앞에서도 먼저 마음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고해소’ 같기도 하다. 삼십 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생 세실! 고맙다! 네가 읽은 시들, 네가 쓴 시들, 그리고 갠지스 강의 보트 투어 툴루, 초보 글쟁이 강산숙, 아름다운 분 김영갑, 북한 계관시인 오영재, 해결되지 않은 상처의 대추리……. 너가 먼저 만난 세상을 통해 나도 한세상을 배웠다.
신경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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