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6/28 조창완(chogaci@hitel.net)
난 무협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영웅문'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외에는 별로 책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내 대화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 무협지에 흔히 나오는 '내공'이나 '갑자'라는 말이다. 아마 요즘 개봉한 스타워즈에서 제다이(기사)들의 능력을 상징하는 '포스'와 비슷한 말일 것이다.
실제로 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것을 실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 나보다 턱없이 높은 내공을 가진 이들을 만났을 때의 곤란함이다. 내가 보기에 내공은 단순히 지적인 능력과 수양의 시간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수양에 맞는 텍스트를 얻는 것과(이것은 무협지에서 중요한 기술을 전수 받는 것과 같다) 자신만의 독립적인 정신으로 그 기술을 접목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시인 오규원은 그런 면에서 독특한 내공을 갖고 있었다. 그가 주로 걸어온 기술은 문명의 갖가지 것들을 패로디해 재해석하는 기법이었다. 이것은 초기의 황지우나 박남철 등이 주로 쓰던 기법이었다. 하지만 오규원은 점차 패로디를 통해 언어를 다루기 보다는 좀더 쉬운 언어로 독자들에게 다가 왔고, 전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는 비교적 평이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 소설에서도 서정성이라는 부분을 가미하기도 했지만 문명비판이라는 기존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학과 지성사 간)를 읽으며, 오규원 시인의 내공이 몇 갑자에 이르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불순할 수 있는 것은 오시인이 오랜 투명시간으로 인해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선 너머로 갑자기 넘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있지만 별다른 책임도 없고, 또 무식하다는 점 때문에 감히 잡문을 쓴다.
오규원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난 당연히 도가적(道家的) 자연관을 생각했다. 도가의 자연관이란 인류의 말중에 가장 어렵고, 복잡한 노자 도덕경 첫 구절인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는 가치만을 내 판단대로 자연에 빗댄 해석이다. 이 말은 존재와 존재간의 관계를 포괄해서 볼 수 있고, 오규원의 이번 시는 그 존재와 존재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도 비롯된다. 물론 가장 주된 대상은 꽃이나 식물 같은 생명체에서 돌과 같은 무생물까지 다양하다.
시인은 시에서 존재간의 경계와 움직임을 선(禪)문답과 유사한 형태로 끌고 간다. 아니 전 우주적인 동적 흐름을 감지한 채 존재들의 움직임과 교류를 감지해서 시어로 포착해내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제자인 장석남시인에게서도 두드러진 부분이다. 따라서 우주가 아니라 내 몸의 기조차 체득하지 못하는 나 같은 범인들에게 그 흐름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시어들은 그의 전 저적인 '마음속 붉은 딱새'에서 풀이됐던 장욱진이나 박수근 등 그가 좋아했던 화가들의 그림과 맞닿아 있음이 확연하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중에 하나는 숫자다. '순간 장미를 두고 사방이 생겼다'.('사방과 그림자'중에서)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는/포도 두 송이/ 오렌지 셋 /그리고 딸기 한 줌'('식탁과 비비추'중에서) '토마토가 있다 / 세 개'('토마토와 나이프' 중에서) 등. 곳곳에 숫자가 담겨 있다. 물론 그가 쓴 숫자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는 '한'(일) 이다. 이것은 그가 말미에 붙인 '두두물물'의 말과 상통한다. '두두와 물물은 관념으로 살거나 종속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도 전체와 부분 또는 상하의 수직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세계는 개체와 집합 또는 상호 수평적 연관 관계의 구조라고 말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일을 지향한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숫자에 대한 논의는 철학의 가장 근본에 있다. 유학에 있어서도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 '주기론', '주리론' 등은 모두 세상의 이치를 숫자 속에서 파악하는 방식을 썼다. 사실 관념의 부분에서 한 단계를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오규원 시인은 순식간에 문명에 대한 시선에서 도가적 사유방식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병마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나 같은 하급 독자들은 좋아하는 시어와 생각들이 순간순간 내 뇌수에 꽂히지 않으면 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 황지우씨의 시집이 의외로 독자들에게 소구했던 것도 이런 탓일 것이다. 물론 황지우씨의 방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이 뒷장의 모두에 썼듯이 시에게서 구원이나 해탈... 진리나 사상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가 요구한 것은 인간이 만든 그와 같은 모든 관념의 허구에서 벗어난 세계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런 방식으로 이 시집은 유효할 수 있지만 이 시집에서 온전하게 시인의 그 세계를 읽어낼 이가 얼마나 될까.(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배 아픈 마음으로 시인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말한다.
잡문을 쓰려 시집을 두 번 읽었다. 두 번 읽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아마 다섯 번쯤 곰곰히 읽으면 몇 갑자인지는 조금이라도 감이 잡힐 것 같다. 하지만 그저 예상일, 관념의 허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내가 얼마나 그곳에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