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분단은 지정학적인 요인을 매개로 하는 영적 요인에 뿌리가 내려져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요인을 매개로 하는 영적 요인이 민족 분단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심화시키고 고착시키는 결정적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족 생존에 있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은 숙명적이다. 숙명적으로 지정학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세력 간섭이라는 생존의 외적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공동체가 선택한 영적 요인 역시 민족 생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까지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 동양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영적 환경 속에서, 영적 요인은 민족 생존에 결정적인 요인으로까지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래로 고난의 민족사에 영광의 구속사가 개입되면서부터, 민족사에 있어서 영적 요인은 민족 생존에 사활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구속사가 개입된 새로운 패러다임의 민족사에 있어서, 영적 요인은 민족 생존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정학적인 요인이 민족분단의 중요한 요소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족 분단을 고착 심화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지정학적인 요인을 매개로 하는 영적 요인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분단을 고착시키고 민족의 통일을 가로 막고 있는 근원이 바로 지정학적 요인을 매개로 하는 영적 요인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정학적 요인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 대륙에 붙어서 태평양으로 뻗어 나온 한반도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세력과 일본과 미국이라는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중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민족 생존은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주변국의 세력 간섭을 제어할 수 있는 자주적 생존력을 갖추었을 경우, 우리 민족은 한반도의 중앙적 위치를 활용하여 주변국의 세력관계를 주도적으로 배제, 조정, 극복함으로써 민족공동체로서 통일 독립 민족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세력 간섭을 제어 조정 및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의 민족 생존은 주변 열강의 세력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된다.
민족사적으로 민족의 생존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륙세력 우위의 세력 패턴을 기반으로 유지되어 나왔고, 근세에 이르러서 일제 36년의 해양세력 우위의 세력 패턴이 허용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열국의 세력 각축전에서, 대륙세력인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해양세력으로서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 사이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려는 시도들이 여러번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한반도의 북부 4 개도를 청나라가 차지하고 남부 4개도를 일본이 차지하려는 분할 안이 제시되었으나, 청나라가 이를 거절했다.
1896년 아관파천 직후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반도의 39도선을 중심으로 이북은 러시아가 지배하고 이남은 일본이 지배하는 분할을 제안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거절했다.
1903년 노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한반도의 분할을 다시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이를 거절했다.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노일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일본은 대륙세력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침으로써 1910년 한반도를 합병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양세력인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원했고, 특히 미국은 태프트-가스라 비밀협약(1905년)을 통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 후,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마침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1945년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폭이 투하되자, 마침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1943년)에 의거, 우리 민족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보장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할 것을 결정했다.
전승국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 결정으로 민족의 분단은 마침내 현실화되고 말았다. 주변 열강의 분할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분단의 현실화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전승 연합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반도 38도선 분할 결정은 1945년 8월 13일 미 국무부 육해군 합동조정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이러한 분할 결정은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8월 8일)를 한지 불과 5일, 소련군이 한반도 웅기에 상륙(8월 11일)한지 불과 2일 만에 내려진 결정이?다.
이 결정은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완전히 무시되고, 오직 한반도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강대국들 간의 전략적 균형을 고려한 일방적 결정이었다. 이 결정이 바로 민족의 분단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 미국은 자유진영의 맹주였고, 소련은 공산진영의 맹주였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결정으로 한반도의 38선 이북지역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이남지역에는 민주정권이 세워짐으로써, 마침내 민족의 분단이 현실화되었다.1)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38도선 이남의 미국은 곧 주한미군을 철수시켰으나, 소련은 1950년6월 25일 김일성을 앞세워서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무력남침을 사주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공산진영의 팽창정책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던 자유진영의 맹주 미국은 6·25 남침을 계기로 적극적 대응 전략으로 방향을 바꾸어, UN군의 깃발 아래 한국전쟁에 적극 개입하게 되었다. UN군이 한만 국경선에 진출하자, 이에 대응하여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에 의해서 야기된 한국전쟁(1950-53)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즉 영적 요인을 토대로 양대 진영 간에 벌어진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진행되었다. 남한과 북한을 대리자로 내세워서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이 한반도에서 제3차 세계 대전을 치룬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에 기인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한전쟁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 이유는 분단과 전쟁의 근본 뿌리가 지정학적인 요인을 넘어서는 이념적 요인, 더 나아가서 영적인 요인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제1장 「민족 분단의 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