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굴 속 같은 방에 있으면 겨울잠을 자는 곰이나 다름없다. 학교를 그만두고부터는 더욱 할 일이 없다. 이렇게 사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밥은 대충 해서 먹으면 되고, 하루 종일 뒹굴다 보면 해가 진다. 다만, 지루할 뿐이다. 지루해도 너무 지루하다. 너무 지루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수업시간에는 한눈 안 팔고, 계획표대로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통지표에 기록된 ‘품행방정’은 ‘품행제로’로 수정되어야겠지만 더 이상 통지표를 받을 일도 없다. 내 몸이 바스러져도 니들 뒷바라지는 해줄 테니까.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우리 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무모한 집착이라 해도 차마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 p.17
“그 시 구절 있잖아,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내가 꼭 그렇다니까.”
“아니, 너는 그렇지 않아. 혹시 독립영양인간이라고 들어봤어?”
“독립운동도 아니고 독립영양은 또 뭐야?”
“신인류의 하나인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는 사람들이래. 우주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영양분으로 변화시켜 살아가는.”
“사람이 광합성을 해서 살아가? 그거 괴물 아니니? 물도 안 마시고 산다는 게 말이 되냐고?”
“폐로 외부의 수분을 직접 흡수한다나 봐.”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서 살아가다니, 웃기는 종족이었다. 여섯 달 동안 단식하면서 수행했다는 네팔 소년 이야기며 유리 상자 안에서 사십 일간 단식했다는 마술사, 사 년 동안 먹지 않았는데도 장밋빛 뺨을 가진 러시아 노인 이야기는 황당무계해서 오히려 우스갯소리로 들렸다. 게다가 순수와 연민, 사랑에서 나오는 내면의 빛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니 궤변에 가까웠다.
하지만 독립명랑, 명랑할 만한 근거나 요소가 없다고 해도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명랑하게 산다는 산아의 발상만은 놀라웠다.
--- p.81~82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 속에서 온몸이 열로 끓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살이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다. 내 몸이 우주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영양분으로 변화시키는 독립영양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속의 귀신은 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미로 같은 벽 무늬만 바라보면서 방 안에 갇혀 지내는 동안 내가 살아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딸! 그러고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어서. 엄마 말 들어.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내 몸속의 습기들을 말려주었다.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몸에서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머릿속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기를 바랐다. 머릿속의 노폐물을 걷어내고 피를 송두리째 갈아버리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바다가 떠올랐을 때, 머릿속이 맑아졌다. 경인선 전철 끄트머리, 월미도는 신기루나 다름없었다. 매일 그곳으로 갔다.
--- p.156~157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엄마는 고운 가루로 변했다. 옥으로 된 함을 받아 드는데 손이 떨렸다. 엄마의 몸이 그렇게 작은 부피로 줄어들 줄은 몰랐다. 언니야, 엄마가 날아갔어. 솔미는 엄마를 화장하는 동안 새를 보았다고 했다. 솔미 말대로 엄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새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간 것인지도 몰랐다.
한 달쯤 지나 꿈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가 그네에 앉아 있는 나를 밀어주었다. 내 몸이 둥둥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엄마를 놓쳤다. 어둠을 훑고 지나간 바람이 엄마의 얼굴을 지워버렸을까. 그날 이후 한동안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해도 늘 발은 진흙 구덩이에 빠졌다. 목구멍에서 진흙덩어리가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후 줄곧 잠을 잤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깨어나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기 위해 잠을 자고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느 엄말 볼 기다. 아버지는 잠들기 전에 무슨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나 매번 엄마를 보지 못한 듯했다. 밤마다 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며 데굴데굴 굴렀다. 언니야, 아빠가 귀신 같아. 정말이지 그때의 아버지는 정상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 p.186
노랗게 부서지던 봄날의 햇살과 사월의 잔인한 바람, 꽃덤불 속의 기이한 열기, 지루한 장마와 괴물 같은 폭우…… 내 마음속의 악마와 귀신들, 그리고 내가 잉태되었던 날의 달빛 여인숙, 이미 지워져버렸거나 혹은 지워야 할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비로소 나의 열일곱 살은 아스라한 봄날의 서커스처럼 멀어져간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레이저 광선을 쏜 듯 공터 한복판에 빛이 반짝하더니 하늘 한 지점에 선명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독립명랑소녀, 파이팅!
……이제는 용기를 내는 거야 껍데기가 되어갈 순 없잖아 예에 세상의 끝에서 너에게 손짓하는 절망의 늪을 떠나서 꿈의 미래 속으로 사람들이 만들어간 거짓된 모습으로 단 한 번뿐인 니 삶을 살아갈 순 없잖아 바로 너야 껍데기가 아니야 그래 이제 살아 숨 쉬는 거야 예에 예에……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