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영적 여정에서 20세기의 비범한 본보기였다. 연약함과 투지, 뜨거운 정열과 넘치는 생기가 즐겁게 뒤섞인 사람이었다. 그의 말과 글은 두 세대의 구도자들, 성도들, 멘토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CD와 책은 헨리 나우웬과의 소중한 대화를 녹취한 것이다. 여기서 얻는 통찰로 독자요 청취자인 당신의 여정이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고난과 개인적 헌신을 통해 빚어진 헨리의 지혜가 밝게 빛나고 있다. 삶을 긍정하는 습성과 미래로 향하는 당신의 걸음을 그의 시각이 가만히 이끌고 붙들어주기를 기도한다. --- 머리말 중에서
사람들이 외롭다는 것, 이거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고통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별별 것을 다 합니다. 그 가운데 오락도 있고 섹스도 있습니다. 모든 섹스가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섹스를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흥분을 찾아 마약을 합니다. 여행도 하고 사람들도 찾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끼어 바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면 할수록 외로움에는 정말 답이 없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나 인간 조직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면, 우리는 금세 요구를 일삼으며 아주 강박적이 될 수 있습니다. 관계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면, 당신은 어느새 바짝 매달리며 졸라댈 수 있습니다. 입맞춤은 사랑의 행동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물어뜯을 수 있습니다. 듣기는 엿듣기가 되고, 다정한 눈빛은 의심의 눈초리가 됩니다. 외로움에서 나온 것이면, 이 모든 온유한 행위도 순식간에 폭력으로 변합니다.
파괴적이지 않은 삶을 살려면 고독이 꼭 필요합니다. 혼자됨을 파괴적이지 않게 창조적으로 받아들이려면 고독의 길을 품어야 합니다. --- 1. “고독” 중에서
당신이 바쁘다면, 아주 바쁘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 어쩌면 당신은 뭔가 입증해 보이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바쁠까요? 어쩌면 그들은 삶의 성공이나 인기나 어떤 영향력을 원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성공하려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인기를 얻으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영향력을 원하면 인맥을 넓혀야 합니다. 문제는 당신의 정체가 바쁨과 뒤엉켜,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곧 나다.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다. 내게 있는 영향력이 곧 나다”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내게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일의 성공이 곧 나라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실패하는 순간 당신은 우울해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순간, 자신에게 아무 영향력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맥이 빠집니다. --- 2. “시간” 중에서
“나는 사랑받는 자”라는 건 독백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모든 종류의 내적 훈련들이 있지요. 내적 훈련으로 이끄는 몇 가지 질문들은 이렇습니다. “나는 계속 슬픔 대신 기쁨을 선택하는가?” “나는 계속 복수의 말 대신 용서의 말을 하기로 선택하는가?” 이것은 아주 내적인 훈련입니다. 그 다음에 모든 관계 훈련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친구로 선택하는가?” “오후 내내 푸념만 들을 줄 알면서도 그 여자한테 갈 것인가, 아니면 내게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남을 돕는 일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에게 갈 것인가?”
온 세상은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서 사랑받는 느낌을 얻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사랑받는 자임을 붙들 수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돈도 쓰고 여행도 다니고 뭔가 하고 여기저기 끼라고, 그래야 쓸 만한 사람이 된다고 유혹합니다. 이 모든 세력들과 어떻게 싸웁니까? 그래서 내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일들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사랑받는 자다”라고 말해줄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신체접촉을 해줄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몸의 포옹이 아주 요긴합니다. 입 맞춰주고 안아주고 잡아주는, 아주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접촉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아주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 곁에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4. “사랑” 중에서
마음은 우리가 가장 우리다운 곳입니다.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면 나는 언제나 거기서 세상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말씀하시면 내 마음은 세상만큼이나 넓어집니다. 세상의 장터처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나 고독을 세상을 등지고 은밀한 자리로 물러나는 일로 생각하지만 그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관상의 삶, 이 신비적 삶은 당신이 고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마음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만큼 더 벼상 속에 있음을 일러줍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관상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재충전하는 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관상은 당신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고독과 기도는 당신을 모든 인간과의 영적 교제로 끌어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모든 인류와의 연대는 늘 함께 다닌다는 게 내 굳은 확신입니다. 사람들과 연대하여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둘은 본질상 같습니다. --- 5. “마음”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그렇게 여쭙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께, 확실히만 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아뢴다면, 원하는 이상으로 확실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늘 어렵거나 심오한 일을 하라고-선교를 가라거나 재산을 다 내주라고-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은 드뭅니다. 대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일을 해봐라. 네 아내에게 화 좀 내지 마라.” “책 좀 읽어라.” 갑자기 당신에게 분명해집니다. “이 작은 일을 내가 정말 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집니다. 그런 작은 일들을 하루에 한두 가지씩 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당신의 삶 속에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내성의 긴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모든 위대한 소명은 천천히 찾아옵니다. 이냐시오나 프란치스코 등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갑자기 회심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 줄곧 싸우고 씨름했습니다. 소명을 찾은 후에도 여전히 애타게 씨름했습니다. --- 6. “기도” 중에서
말은 뭔가 전하라고 있지만, 당신이 전하려는 바가 말보다 큽니다. 나와 당신의 대화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고독이나 침묵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말하지는 못합니다. 변죽을 울릴 뿐입니다. 마침내 당신이 고독이나 침묵의 개념을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대한 많은 말이 당신에게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침묵에 이르는 길입니다. 나는 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거의 평생 강의와 강연 따위로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거의 평생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들 너머에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체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실체는 무언입니다. 말은 실체를 쪼개고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을 넘어설 줄 아는 것이 퍽 중요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말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침묵을 많이 연습하면 말이 함축적이고 충만해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은 침묵에서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요란하고 시끄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수가 아주 적고 어쩌다 한번씩 아주 단순한 말만 하는데, 실체를 깨닫게 하기에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 7. “침묵” 중에서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습니다. 그건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악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정확히 그런 곳입니다. 성 요한은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이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다는 신비와 더불어 사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께 “다 너한테 줄 수 있다. 어차피 내 거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원치 않는다”라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요지는,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전체를 뒤집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늘 어둠에 놀랍니다. 어떤 어둠은 악에서 생겨납니다. 라디오를 듣거나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면 뉴스가 나옵니다. 세상이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음이 보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건 좀 봐. 비참하지 않아? 끔찍하지 않아?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 악에 놀랍니다. 하지만 선에 놀라야 마땅합니다. --- 8. “어둠” 중에서
“비록 세상이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으나 악은 이미 정복되었다. 나는 피해자가 될 필요가 없다.” 복음의 비논리적 선고는 바로 거기서 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냥 역설 같은 이런 모든 말이 악의 권세를 깨뜨립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승리를 선택하게 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승리를 선택합니다. 당신과 내가 사고를 당해서 똑같이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시다. 문제는 “그 상태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이걸로 인생 끝장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지금부터 소명의 시작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 조건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입니다. --- 10. “선택” 중에서
영원부터,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했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문제 전체는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제, 내 자매, 내 교사는 모두 나를 사랑하지만 또한 내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우리를 사랑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늘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우리는 가장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소말리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나를 넉넉히 사랑해 주지 못한 어머니나 매우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나 내 교사나 내 교회가 내게 상처를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입니다.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게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에 끊임없이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아름다우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일생의 모든 기회가 “예,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 11. “예배” 중에서
우리는 “더 크게 살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삶이 자잘한 일들로만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별로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큰 아름다움, 삶의 더 큰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입니다. 인간의 영이 활동할 때마다 우리는 공동체, 고독, 침묵에 관한 의문들, 기도, 예배를 보게 됩니다. 때때로 인간의 영은 형식상 종교적인 방식들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영이 소멸되면-많이 보이는 현상이지요-폭력, 극히 자기중심적인 행동, 자아도취, 중독, 완전히 길 잃은 사람들, 자살, 파괴와 어둠이 생겨납니다. --- 13. “영성”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어떻게든 우리는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 때도 있고,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고독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붙잡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모두가 입 다물고 고독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독과 침묵은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다릅니다. 고독과 침묵은 공식적 의미에서 세상 문제들의 해답이 아니라, 아주 깊은 영적 의미에서만 그렇습니다.
--- 14. “행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