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주 빠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 마.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과, “우린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분발해서 일해야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 중에 과연 누가 끝에 가서 더 성공할 것 같은가? 거만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지도자가 겸손하고 힘을 실어 주는 지도자보다 더 위대해 보인 적이 혹시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최고의 조직에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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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로마 정부가 그랬듯이 기독교인의 목적이나 윤리를 위반하는 법이나 규례를 가진 정부도 있다. 정부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뇌물을 요구할 수도 있고, 비윤리적인 규칙이나 규제를 가하기도 하며, 사람들을 고난과 불의로 몰아넣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목적에 세금을 쓸 수도 있다. 세금 문제에서 그러셨듯이, 예수님은 이런 모든 남용에 일일이 다 저항하라고 요구하진 않으신다. 우리는 적국에 있는 스파이나 게릴라 같은 사람들이다. 적국의 모든 요새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꼼짝달싹 못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항상 무엇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장 크게 확장시킬지를 물으며 행동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착취하는 행위에는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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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을 직장 내에서 의롭고, 지혜롭고, 노련미 넘치는 증인, 예수님의 의와 지혜와 뛰어나심에 대한 증인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모습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 즉 약점이 있고,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래도 발전해 나가는 사람, 예수님의 성품을 증명해 보이기보다는 그분의 자비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고 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증거는 직장 동료들이 우리처럼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방식 안에서 우리와 함께 성장해 가도록 북돋우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철저하게 스스로를 훈련해 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핑계 삼아 죄 안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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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자기희생 행위는 다양한 방식의 대가 지불을 뜻한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기도 하셨지만, 그에 수반된 극심한 고통과 갈증도 감내하셨다(요 19:28). (요한은 예외였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비통함을 겪어야 했고 어머니에게 자식을 잃는 큰 슬픔을 안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요 19:26-27).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는 수모도 겪으셨다(요 18:19-24).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을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다. 태초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도대로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 역시 공정하지 않게 느껴지는 비용을 요구할 때가 있고, 그 비용을 지불해야만 일을 마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일하셨다. 일을 자기 예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 주신 본에서 그만큼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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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황에서 경제생활의 어느 측면이 크리스천의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지 자문하게 한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계속해서 구매하는가? 크리스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에 해당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사고 있는가? 그 물품의 ‘브랜드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나 부, 권력, 지성, 아름다움이나 다른 속성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 호소하는, ‘꼭 갖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몇몇 브랜드 품목들이 생각이 날 수도 있다. 만약 크리스천이 자신들의 지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만 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브랜드와 자신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우상숭배가 아닐까? 근본적으로 명품을 구매하는 것은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을 구매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경제적 결과들을 맞이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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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어떻게 존중하는 자세로 우리가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지 모델을 보여 준다. 그것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아덴(아테네)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거기에서 발견되는 여러 신의 신전들을 관찰한다. 바울은 그가 거기서 발견한 ‘예배 대상들’을 ‘자세히 살펴봤다’(행 17:22)라고 보고하는데, 거기서 그는 사람들의 ‘상상과 솜씨에 의해 만들어진’(행 17:29) 것에 주목한다. 바울은 그들의 문학을 읽고, 그것을 인용할 만큼 충분히 익힌 후 존중하는 태도로 그것을 대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설교에 그것을 포함시킨다. 실제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바울은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인용해 말한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급진적 사회 변혁에 헌신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사회의 모든 것을 크리스천들이 반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는 완전히 무신론적이지는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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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직장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관찰자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교나 사업체, 정부, 또는 다른 직장에서, 비록 그것들이 크리스천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좋은 관행들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진정한 관찰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을 불신하지 말고 도리어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노무/경영 관계, 고객 서비스, 연구 개발, 회사 및 민간 관리, 공공교육 및 기타 분야를 향상시키기 위해 비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대학, 기업체, 비영리 단체 및 다른 곳들에서 개발된 기술들이나 지혜들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일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깊게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행 17:27)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 줘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틀렸소’라고 말하는 것과 ‘저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일의 진가를 당신보다 훨씬 더 알아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를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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