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풀의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자연에 대해 다 안다고 자부하지만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다르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체험하는 것의 10분의 1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길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하리라. 온갖 해찰을 부리며 걸어야 하리라. 올레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자.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 p.23~25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불가능이 없다. 어떠한 조건이나 난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건 토착민이건 누구나 여행자다.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사랑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조건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 사내의 순정이 사랑을 완성했다. 하지만 사랑의 시작은 여행자와의 만남이었기에 가능했다. --- p.97
오늘 섭지코지의 길에는 초원을 노닐던 발들은 사라지고 레스토랑 손님을 실은 전기자동차들만 유유히 질주하고 있다. 사업주는 이곳을 국내 최초의 친환경 해양리조트로 개발했다고 기만적인 언어로 선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하고 인공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건축물일지라도 건축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자연유산인 섭지코지를 파괴하고 들어선 저 건물들을 분명 제주의 재앙이다. 이제 나는 다시 섭지코지에 가지 않을 것이다. --- p.233
제주 창조 여신인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의 셋째 딸이었고 거인이었다. 할망이 치마로 몇 번 흙을 날라다 만든 것이 한라산이다. 흙을 나르던 중 터진 치마 사이로 떨어져서 굳은 것이 오름이다. 할망의 나막신에 붙었다가 떨어져 나간 흙덩이들도 오름이 되었다. 한라산이 너무 높아 봉우리를 꺾어 던졌더니 산방산이 되었다. 성산일출봉은 할망의 빨래 바구니고 우도는 빨래판이다. 본래 우도는 제주 본섬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할망이 한번 오줌을 누자 흙이 쓸려나가 그 사이는 바다가 되었고 우도는 섬으로 떨어져 나갔다. 설문대할망이 백록담을 베개 삼아 누우면 허리가 고근산에 걸쳐지고 다리는 범섬에 닿았다. 이때 설문대할망의 발가락이 닿아 뚫린 구멍 두 개가 있다. 이 구멍은 범의 콧구멍을 닮았다 하여 ‘콧구멍’이라 부른다. 범섬의 두 동굴이다.
강제윤의 『올레, 사랑을 만나다』는 외지인의 눈에 비친 이국적인 제주 올레길의 풍광을 다루지도, 올레 여행을 더 즐겁고 맛있고 편하게 하는 법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제주인보다도 더 제주의 아픈 역사에 깊이 공감하고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뼛속 깊이 사랑하는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한 길 더 깊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들어가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그들의 마음을 헤쳐 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제주 올레길을 걷는다면, 당신은 아마도 제주 풍경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속살까지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저자 강제윤에게서는 바람의 냄새가 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 같다. 사람은 섬세하면서도 담대하고 문장은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대한민국의 모든 유인도 5백여 개를 다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한곳에 열흘 이상 머물지 않았던 바람 같은 떠돌이가 1년 넘게 올레와 사랑에 빠진 치명적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나그네가 제대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서명숙 (『제주걷기여행』 저자, 제주올레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