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의 목을 쳐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성철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하시려고 할 때 내가 벌떡 일어섰다.
“성철의 목을 한 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백골연산白骨連山
“예? 뭐라구요?”
“시끄럽다 앉아라! 저노무 자슥, 열아홉 살 행자 때부터 알았네 몰랐네 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나, 사기꾼 같은 놈!”
그 때 나는 하루 빨리 눈을 번쩍 떠서 성철스님의 멱살을 잡아야겠다는 욕심으로 꽉 차 있었다.
...깨닫는 것을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한다. 알고 보면 그냥 바로 그 자리인데 자꾸만 애써서 무엇을 구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에, 구하려는 욕심 때문에 본성을 못 보는 것이다.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진해 통제소 강당으로 달려가 보니 바다에서 바로 건진 시신들이 줄줄이 눕혀져 있었다. 동생이 거기 있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게 내 동생이 맞았다. 환하게 웃던 동생이, ‘형’하고 부르며 쫓아다니던 동생이, 하나뿐인 내 동생이 거기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구부러진 채 좁은 관 속에 눕혀져 있던 동생, 그 모습을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49재 마지막 날 국립묘지를 나서며 원願을 세웠다.
‘생사에 대한 문제, 존재에 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영예가 될 것이며, 극락에 간들 무엇이 그리 즐겁겠는가? 내가 날 모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를 무등 태우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 옆에서 나를 부축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고 죽는 이 주인공의 본래 모습을 바로 알 수만 있다면 나는 하루에 천 번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들어가고, 천 번 쇠꼬챙이로 몸을 쑤시고 찌르고 토막 내는 그런 지옥에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겠다.’
* 살아있는 화두
“지난 철에는 어디서 살다 왔느냐?”
“이번이 첫 철입니다.”
“응? 첫 철이야? 그럼 화두는 어디서 탔는가?”
선방에서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받는 것은 기본이다.
“6ㆍ25전쟁이 나서 쌀 배급을 타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어디 가서 탑니까?”
...나는 ‘화두를 탄다거나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 나서 쌀 배급 타는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타러 다니는가? 화두가 보따리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챙기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것만 알면 됐지 뭘 따로 타서 의심을 하는가?
참으로 진실하게 자기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 따로 화두를 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물음이 없거나 간절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큰스님들이 방편으로 화두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간절한 의심이 저절로 올라오지 않으니 억지로 의심을 짓는 것이다.
* 다비식에서 부른 유행가
“어이 명진, 이춘성이가 말이여, 지옥이나 극락 가실 스님인가? 자기가 알아서 제 길을 가지 그거 못 갈까봐 앉아서 지장보살 염불을 해? 수좌가 말이여 평생 화두 들다가 죽었는데 극락 가라고 지장보살을 부르면 안 되지. 그거 때려치우게. 명진 수좌가 척 하니 알아서 분위기를 바꿔 봐.”
불길이 훨훨 치솟는 다비식장에 노스님들이 죽 앉아 있는데 내가 그 가운데로 나갔다.
“거 춘성 스님께서 극락 지옥 그거 못 찾아갈까 봐 지장보살을 염불합니까? 지금부터 전국 본사 수좌 대항 노래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법주사 대표로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이 우루루 나와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분위기가 곧 잔치판이 되어버렸다. 당시 오륙백 명의 신도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너무하다고 했고 일부는 춘성 스님 다비식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인터넷이 있었더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 나는 영원히 사춘기로 살고 싶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춘기를 겪게 된다. 반항하고 대들고, 못된 짓, 엉뚱한 짓을 도맡아 하는 시기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물음은 그 사춘기 때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그 시기에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름이 남으면 뭐하고 남들이 알아주면 뭐하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아득한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춘기 때 처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 나를 향한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영원히 사춘기로 살고 싶다.
* 복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라
복이란 것은 그 과보가 다하면 언젠가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물거품에 햇살이 비춰서 무지개가 서리면 아주 찬란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거품이 아무리 예뻐도 그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거품일 뿐이다. 큰 거품, 작은 거품, 오래 가는 거품, 빨리 꺼지는 거품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다 꺼져버린다. 복이라는 것은 이런 거품과도 같다. 아무리 많아도 언젠가는 다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절에 오는 것은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항상 깨어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을 것인가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절에 오는 것이다. 이제 나만 생각하는 기도, 나만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에서 벗어나 보자. 스스로 복을 짓고 수행을 해서 나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원을 세워 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혼탁하고 이기적인 세상을 정말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가겠다는 원력을 세워보자.
*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만큼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병원에서 암 말기라 육 개월밖에 못 산다고 덜컥 진단을 받았다고 치자. 앞으로 육 개월밖에 못산다고 하면 기가 막힐 것이다. 그런데 왜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산다고 생각할 때는 느긋해지는가? 사실은 삼십 년도 잠깐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 일이 아니다.
* 애지중지 키우던 외아들이 죽었다고 하자.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 앞에서 ‘자, 이제부터 아들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다’이렇게 작정하고 우는가? ‘오늘부터 밤을 새워서 용맹스럽게 일주일만 울어보자, 한 시간 울고 십 분 쉬고, 한 시간 울고 십 분 쉬고 그렇게 8시간 동안 울어보자’ 그렇게 하는가? 정말 슬픈 사람은 잠을 자다가도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흐른다. 밥을 입에 넣다가도 자식 생각이 나면 눈물이 쏟아지면서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내가 나를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밥을 먹어도, 잠을 자려고 누워 있어도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올 것이다.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 꼭 선방에 가야만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간절한 물음 그 하나만으로 자연스럽게 물어 가면 된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게 뭔가?’하는 물음이 스물 네 시간 끊임없이 다가오면 되는 것이다.
* 참선을 설명할 때 ‘어미 닭이 알 품듯이 고양이가 쥐 잡듯이’ 집중하라는 표현을 쓴다…나는 이 표현을 ‘박지성이 축구공 쫒아가듯이 이승엽이 야구공 노려보듯이’ 라고 바꿔 표현하고 싶다. 박지성 선수가 넘어질 듯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을 따라가듯 이승엽 선수가 끝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듯 ‘나는 뭘까?’하는 물음에 집중해야 한다... 그냥 적당히 묻다가 말다가 대충하는 게 아니다. 오 분이든 십 분이든 생각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지극한 마음으로 물음에 집중해야 한다.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야 되는 것이다.
* 복은 누군가에게 빌고 구해서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복을 짓고 좋은 일 하는 것은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극락도 내 발로 찾아가고 지옥도 내 발로 기어들어간다. 그것을 자작자수라고 한다. 나의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하는가? 나의 행동, 나의 말 한 마디, 나의 마음 씀씀이가 복도 짓고 화도 부른다.
* 부처님 법은 나이가 말해주는 게 아니다. 열 살 된 사미가 깨달았다면 백 살 먹은 큰 스님이라도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 중노릇을 오래 했느냐 적게 했느냐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오직 올바른 견처를 가졌는가에 있다.
*나는 10ㆍ27 법난 때처럼 절이 군홧발에 짓밟혀도 정권에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하는 불교의 처참한 모습이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팠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은 우리 수행자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나 신부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며 뛰어다녔다. 개운사가 ‘제2의 명동성당’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 살불살조라는 말이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교조인 부처님과 스승인 조사들도 죽이라는 이 말은 단순한 파격이나 도발이 아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그것에 매이면 이미 도그마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매인 바 없고 구속된 바 없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 육조 스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혜명 존자가 한마디 가르침을 구했을 때 ‘불사선 불사악'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선업에 묶여 있는 것은 명주실로 부드럽게 잘 짠 밧줄로 나를 묶어놓은 것과 같고, 악업에 묶여 있는 건 가시가 촘촘히 박힌 쇠 철조망으로 나를 묶어놓은 것과 같다. 명주실로 짠 보드라운 밧줄에 묶여 있는 게 ?시철조망에 묶여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까? 아무리 보드라운 밧줄에 묶여 있어도 묶여있긴 매한가지다...좋은 밧줄이든 나쁜 밧줄이든 나를 묶고 있는 모든 업의 밧줄을 다 끊어내야 걸림 없는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허공에 어떤 때는 뭉게구름, 어떤 때는 새털구름, 또 어떤 때는 먹장구름이 일어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마음속에 슬픔과 기쁨, 괴로움과 분노,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등 온갖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가 지금은 어디 있는가. 내 마음에 무슨 흔적이 남아 있는가.
허공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새들은 자유롭게 날고 꽃은 붉게 피고 버들은 푸르며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공묘유의 도리이다.
* 지혜가 생기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 생사가 본래 없고, 나고 죽는 것이 큰 물에 거품 하나 일어났다 꺼지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생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이기지 못하며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이기지 못하니 어느 것이 진짜 부처인가? 모든 것에 부처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정작 부처는 아무런 형태가 없다. 불교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자기 마음속의 부처이다.
* 불교처럼 우상을 배척하는 종교도 없다. 스님들은 공부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면 경전도 불태워버리고 불상도 쪼개 불쏘시개로 썼다. 진리에 대한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처럼 파격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종교가 불교임을 알아야 한다.
* 재정 투명화는 앞으로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 개인적인 결단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이 제도화되는 게 더 중요하다.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이 정착되면 시줏돈이 정말 귀하게 쓰인다는 것을 신도들이 알게 되어 스님들을 더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신뢰가 회복되면 앞으로 재정규모가 계속 커질 것이고 종단에도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봉은사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의 바람이 한국 불교 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겨우 씨를 뿌린 것에 불과하다. 그 원력이 얼마나 이루어질는지 모른다. 다만 수행자로서 내가 갈 길을 계속 갈 뿐이다.
*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의 운영도 당연히 수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천도재나 제사가 기본이 되는 ‘제사종’, 관람료를 받아서 운영하는 ‘관람료종’, 입시기도위주의 ‘입시종’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거듭나야 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