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조물주가 있었다. 그때, 세상 만물은 이렇게 저렇게 뒤섞여 있었다. 그 무질서한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조물주는 믿어왔으나, 계속 보고 있자니 더는 견디기 싫은 순간이 다가왔다. 처음 만들었던 그대로 두겠다고 결심했던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조물주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세상 만물을 분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결정은 사소했으나 위대했다.
밝은 물건과 어두운 물건을 구분했더니 세상은 한층 밝은 곳과 어두운 곳으로 나뉘었다. 그동안 하루가 지났고 조물주는 다소 정돈된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날 그는 무거운 물건과 가벼운 물건을 구분했고, 무거운 물건 위에 앉아, 가벼운 것들이 둥둥 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셋째 날에 조물주는 시끄러운 물건과 조용한 물건을 나눴고, 넷째 날에는 뜨거운 물건과 차가운 물건을, 다섯째 날에는 단순한 물건과 복잡한 물건을 나눴다. 벌써 여섯째 날이었다. 그는 물건을 가치 있는 것과 흔한 것으로 나누고 이게 잘한 짓인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일곱째 날, 그는 지난 엿새 동안 피곤해진 몸을 쉬려고 했다. 그는 무거운 것 위에 몸을 뉘였고 차가운 것을 머리맡에 놓았다. 어두운 것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가벼운 것으로 몸을 덮었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미처 분류하지 못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어느 기준에도 맞지 않거나 반대로 모든 기준에 다 들어맞아서 남겨진 물건들이었다. 조물주는 그것 중의 하나를 집었다. 그건 노란색 오리인형이었다.
조물주는 욕조에 오리인형을 내려놓았고, 오리인형은 비누 거품을 헤치며 욕조를 돌아다녔다.
“귀엽네.”
조물주는 말했고, 지금껏 분류되지 않았던 물건들에 ‘귀여운 것’이라 이름 붙였다.
--- 「신, 천지창조 마지막 날」 중에서
“슈퍼맨이 있으면 슈퍼맨이 무찔러야하는 괴물도 있나요?”
“이 세상에 괴물 같은 건 없어요.”
미소녀는 딱 잘라 대답했다.
“악당은요?”
“악당도 없어요. 적어도 당분간은. 또 다른 질문은?”
“음, 저, 그러면 희망은 왜 사라진 건가요?”
“서울은 희망이 살기 힘든 도시인가봐요.”
미소녀는 대답했다.
--- 「영만, 국제슈퍼맨협회에 가입하다」 중에서
“저를 냉장고에 넣어주시겠습니까?”
천사는 코끼리의 요청을 승낙했다. 코끼리가 냉장고에 넣어달라는데 어떻게 거절을 한단 말인가? 천사는 냉장고를 포장한 상자를 벗긴 다음, 냉장고 문을 열었고, 코끼리를 넣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뭐예요?”
“사는 게 힘들어서요. 힘들게 대학 졸업해도 취직이 어지간히 힘들어야죠. 나름대로 학점도 높이고 토익도 높이고 자격증도 땄어요. 중국으로 유학도 갔다 왔어요. 제2외국어까지 하는데도 취직이 힘들었어요. 어른들은 눈을 낮추라고 하는데 그게 되나요. 당장 내가 좋은 회사를 들어가지 못하면 내 삶의 등급이 달라지는 판이잖아요. 정권 바뀌면 실업률이 낮아진다더니 낮아지기는커녕 초임만 몇백만 원 줄었어요. 요즘은 집값이 왜 그리 비싼지 월세 구하기도 힘들어요. 전세는 바라지도 않아요. 이 동네 재개발된 거 알죠? 전세 절대 못 구해요. 물가는 환율 오르면서 천정부지로 같이 올랐는데 내려갈 생각은 안 하네요. 여자친구랑 패밀리 레스토랑 갈 돈도 없다니까요. 레스토랑이 뭐야, 영화도 마음껏 못 봐요. 아니, 그런 건 다 좋다고 쳐요, 정말 다른 건 다 좋다니까요. 월급 밀리지 않고 퇴근만 제때 시켜주는 직장에 다니고 싶어요. 퇴근시간이 늦으면 어때요, 잠을 좀 줄여서 놀면 되죠. 그런데 아예 퇴근을 안 시켜주면 절 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친구는 직장 다니면서 대학원도 같이 다녀서 석사 딴 다음에 경력직 구하는 직장으로 옮기라는데 그러면 빚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공무원시험 준비는 하기 싫어요. 그건 또 언제 준비해서 합격하겠어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냉장고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여기로 온 거예요. 이봐요, 행복하다는 게 뭔가요? 나는 그저 코끼리답게 살고 싶은 건데, 그건 행복의 기준에 안 들어가나요?”
--- 「분홍색 코끼리, 냉장고에 들어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