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여행은, 숨쉬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냥 숨 쉬기. 밥 잘 먹고 숨 잘 쉬고 사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숨이 답답하고 짧아지고 가빠질 때 숨을 쉬러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요. 여행을 많이 해도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성이 성숙해진다거나 잃어버린 참나 같은 것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아요. 다만 다른 공간에 몸과 마음을 가져다놓으면서 막혔던 숨구멍이 열리는 것, 그것만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정도만 해도 여행은 나에게 큰일을 해주는 거지요. 그렇다면 여행 자체가 생명줄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마치 물속에서 수영을 하다가, 아, 지금은 숨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하면서 물 밖으로 확 솟구쳐 올라 숨을 고르는 것. 그게 여행일 거예요.” --- 프롤로그 중에서
산행을 할 때마다 초입의 오르막길을 걷는 것이 늘 숨이 벅찼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호흡을 조절하고 물을 마시고 헉헉대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도 이을 수 없을 만큼 가쁜 숨을 쉬면서 항상 기다렸다. 어서 평탄하고 포근한 나무 숲길의 나타나기를, 하얀 오솔길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넓고 큰 바위가 있는 능선 길에서 쉴 수 있기를.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계단에 발을 걸칠 때마다 온 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무겁고 퍽퍽하다. 그래도 믿고 걸었다. 기다리면 올 순간은 반드시 왔으니까. 이렇게 한 시간만 죽을 것처럼 힘들고 땀을 흘리고 나면 그 후엔 다리도 마음도 산에 적응해 저절로 걷게 될 것이다. 처음엔 마음만 먼저 오르고 다리가 못 따라오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마음과 다리가 함께 움직이고, 조금 더 걸으면 마음보다 다리가 먼저 걷고 있을 것이다. --- p.158
지난 날 어떤 여행에서도, 어떤 산행 길에서도 가장 큰 감동과 환희는 인간에게서 오지 않았다. 잊히지 않은 과거의 기억에서도 오지 않았다.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은 늘 자연 속에서 몸의 리듬을 따라 걸을 때 찾아왔다. 나무와 꽃에 푹 파묻혀 그 속에서 아주 작은 한 점이 되어 꼬물거리듯 움직일 때, 가쁜 호흡과 고요한 숨을 번갈아 쉬며 잠시 바위에 앉았을 때 그것은 찾아왔다. 걷고 숨 쉬고 물마시고, 다시 걷기만 하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머리는 극도로 비어지고 숨을 토해낼 때마다 슬픔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마라톤 주자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러너스 하이처럼 산을 오를 때도 어쩌면 그 가쁜 숨결 속에서 클라이머스 하이 같은 순간이 있지 않을까. --- p.159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결과적으로 날 여기로 올 수 있게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보냈다. 순간, 순간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속을 썩인 사람도, 떠나간 사람도. 그들은 여기에 나를 보내기 위해서 그때 그 일을 한 것처럼 고맙게 여겨졌다. 내가 아무 일도 겪지 않고 이럭저럭 행복하기만 했었다면, 여기 히말라야로 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견디고 잘 살아보려고 매일 매일 걷지 않았더라면 이곳을 꿈꾸진 않았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모두들. 그리고 나도 참 잘못했어요.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고는 끊임없이 남 탓을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어요. 말들에 걸려 그 말들을 붙잡고 악다구니를 썼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어요. 사랑한다더니, 그게 사랑이냐고, 증거를 보여달라고 너무 소리쳤어요. 미안해요. 모두들.” --- p.177
시간을 수없이 감아올려 땀으로 그 논을 일구고 가꾸어갈 발리 어느 농부의 삶에 나는 소리 없는 경배의 염이 솟아나 존경의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그것은 가난한 날들과 쉼 없는 노동에 대한 섣부른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었다. 당신들의 기나긴 노고와 시간의 흐름처럼 여기를 지금 여행자로 지나가는 나도 당신들만큼 수고로이 살아왔다는 어떤 공감이었다. 나의 지난날 일하며 살아온 시간도, 지금의 여행자의 시간도 옳은 것이다. 당신들도 옳고 나도 옳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리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갔다. 숲 속에 낮게 지어진 집들을, 몇 킬로나 이어진 돌조각을 하는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을, 오리 떼가 농사를 짓는 계단 식 논을. 일 년에 세 번이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발리 논의 초록색 풍경 속을. --- p.349
바다 쪽에서 불어와 일순 땀을 걷어가는 바람은 여전하다. 여기저기 솟아난 오름의 완만한 선들도 여전하다. 오름 아래로 보이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풍경도. 이 여름이 가고 나면 붉게 물들 나무들은 현재 초록에 지쳐 있다. 엉겅퀴 꽃마다 벌들이 하나씩 들어있는 것도, 후르륵 날아가는 나비도, 모두 모두 여전하다. 소금 땀이 하얗게 검은 옷에 맺히는 것마저도. 선작지왓의 드넓은 끝에서 만나는 백록담의 가파른 언덕도, 일망무제의 너른 벌판도, 저 위에 활짝 핀 목화솜처럼 하얗게 몽글거리는 그림 같은 구름도 여전히, 여?하다. 철철 땀을 흘리거나 줄줄 눈물을 흘리거나 실실 웃으며 오르거나, 나의 마음상태나 몸의 느낌과 아무런 상관없이 한라산은 고맙게도 여전했던 것이다. 내가 오르던 몇 년 전부터, 그 이전부터. 머나먼 옛날부터. 그런 여전한 것들이 있어주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 p.379
여행자 중의 큰 언니, 엄마 같은 어진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 말했다. “봄 구경, 꽃구경 잘 했습니다. 봄은 이미 산에도 들에도 마음에도 왔어요. 그러나, 그대가 웃어야, 봄입니다.” 눈에 씌었던 비늘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꾸린 짐 중에서도 가장 무거웠던 그대라는 짐, 슬픔이라는 짐, 마음이라는 짐, 봄을 맞이하고 웃고 싶다는 놓을 수 없었던 짐을 그제야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동자에 맺힌 꽃들의 색깔이, 콧등에 머물던 꽃들의 향기가 조금씩 흩어져 가는 봄날, 그래서 그대에게 마음으로 띄우는 편지 한 통을 쓸 수 있었다.
--- p.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