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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비, 낮에 나온 달

지나가는 비, 낮에 나온 달

[ 개정증보판 ]
정경윤 | 가하 | 2017년 10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4 리뷰 4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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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0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500쪽 | 638g | 148*200*30mm
ISBN13 9791130024059
ISBN10 113002405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권현준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름 석 자만 덜렁 던진 현준은 은수의 작은 체구, 동그랗고 뽀얀 얼굴, 크게 쌍꺼풀 진 눈과 까만 눈동자, 활짝 웃고 있는 분홍 입술과 양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녹원호텔 오너 하규원의 2남 3녀 중 막내딸은 확실히 단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생김새의 소유자였지만 스물네 살이라던 나이보다 훨씬 더 앳되어 보였다.

아직 볼에 솜털도 안 가신 듯하다.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게 생겼다. 그녀에게서 풋내가 풀풀 날리는 것만 같아 현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설익은 건 역시 질색이다.

애초에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회의가 길어져서 도저히 못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면 간단했다.

그 간단한 일을 끝까지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 여기서 확실히 해두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결혼식장에서 서로 마주 보게 될 테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하은수예요.”

약속시간에 40분이나 늦은 주제에 현준이 사과 한마디조차 내놓지 않았음에도 은수는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은 듯 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만 있었다.

계속해서 웃기만 하는 걸 보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현준은 일부러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오래 기다렸지요?”
“어머, 아니에요. 약속시간 십 분 전에 도착해서 오십 분밖에 안 기다렸는걸요.”

은수는 환하게 웃으며 물을 마셨다. 담담한 대답과는 달리 그녀의 잔은 어느새 정직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동안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건너다보기만 하던 현준은 밖에서 대기 중인 웨이터를 불렀다.

“오래 기다리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식사 주문부터 하시죠.”
“그럴까요?”

열심히 메뉴를 훑어보는 은수의 긴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현준은 애교머리가 흘러내려 있는 그녀의 매끈한 이마를 슬쩍 보곤 자기 몫의 요리와 와인을 먼저 주문했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듯하지만 지금쯤 은수는 분명 가늠했을 것이다. 초면에 도를 넘어설 정도의 지각을 하고 사과도 않는 현준의 인성 수준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은수가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일부러 그녀의 요리까지 일방적으로 주문해버렸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심지어 와인 종류까지도 철저히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이쯤 되면 이쪽이 품고 있는 적의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태도였다.

주문을 다 받은 웨이터가 물러가자 은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쩔쩔매다 또 웃어 보였다.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뜨릴 만도 한 상황인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연기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메뉴 고르는 귀찮음을 덜어주셨네요.”

대칭으로 깊게 파이는 은수의 볼우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현준은 이번엔 차가운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은수 역시 현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호응도 없는 말을 이어갔다.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들었어요. 미주법인에서 굉장한 실적을 거두고 돌아와 본사 경영에 있어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 젊은 나이에 사장 자리까지 오르셨다고, 저희 아버지께서 굉장히 높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식상하고 틀에 박힌 찬사였다. 마치 누가 대본을 써주고 외우라고 시킨 것처럼.
현준은 은수의 말허리를 딱 자르고 끼어들었다.

“서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생략할 건 생략합시다. 어차피 큰 의미도 없는 자리니까.”
“아…….”

현준이 몸담고 있는 센텀그룹의 효시는 해방 직후 부산에서 철물을 취급하던 만수상회였다. 만수상회는 당시 부잣집 머슴이었던 현준의 조부 권만수 명예회장이 주인집 금붙이를 훔쳐 달아난 뒤 일으켰던 것이었다. 소규모 철물점이 어느덧 국내 굴지의 대그룹으로 우뚝 서고 그때의 어린 머슴은 이미 구순(九旬)을 앞둔 노인이 되었건만, 시작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권 회장은 일평생 머슴 출신, 상놈이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렸으며 자식손자들을 좋은 집안과 연결시키는 데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장차 회사를 물려받을 장손인 현준 역시 그 영향을 비켜갈 수 없었던 것이다.

녹원호텔 가문과의 혼사는 결혼할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반쯤은 이야기가 진행된 일이었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녹원가문은 그동안 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정재계에 두루 발이 넓고 특히나 예술사업 쪽에 강해, 곧 완공을 앞두고 있는 센텀아트센터의 개관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장점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런 가문과 사돈을 맺는 것은 현준의 조부에게 있어서 큰 만족이었고 회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녹원 쪽에 있어서는 센텀그룹의 막대한 자금과 재계 영향력을 추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고 말이다.
현재 벌어진 이 판을 둘러싸고 앉은 이들 중 손해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 지금 현준의 눈앞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말간 얼굴로 앉아 있는 저 애송이 계집애만 뺀다면 말이다.

“중도대학교 서양화과라고 했던가요?”
“네. 곧 졸업이에요.”

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와인잔을 몇 번 돌리고는 한 모금을 머금었다. 평소 즐기던 와인인데 오늘따라 씁쓸함만 느껴질 뿐, 영 별로다.
그때 은수가 다소 의외의 말을 꺼내놓았다.

“제가 미술 전공을 해서 아트센터에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 죄송해요. 저희 집안과는 달리 저라는 사람 자체는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전 그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거든요.”

현준은 나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곤란한데요. 결혼 후 그쪽이 한자리를 맡기로 이미 양가 합의 다 끝난 모양이니까요.”

은수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미소를 띠더니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은 멀리 밀어둔 채 물이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노력은 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 도움 안 될 거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그쪽으로 너무 기대하진 말아주세요.”

현준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않은 채 와인만 연방 홀짝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렇게 생글생글 웃고만 있는 건 당돌하게 한 방 먹이려고 기회를 살피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설마 그저 순진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건가.
속 편하게 또 웃고만 있던 은수에게서 마침내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게 하는 질문이 건너왔다.

“결혼하면 특별히 바라는 게 있으세요? 물론 제가 완벽하게 다 잘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맞출 수 있게끔 열심히 할게요.”

와인잔을 다 비운 현준은 못 먹을 것이라도 삼킨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한숨을 쉬고서 내뱉었다.

“나는 특기도 일, 취미도 일. 휴일도 없고 한 달의 반 이상 출장에 퇴근시간도 일정치 않아요. 아예 귀가 않고 회사에서 자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말하다 말고 현준은 돌연 재킷 안쪽의 포켓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휙 날렸다. 두 번 접어 작게 만들어둔 A4 규격용지였다.
얌전히 손을 내밀어 종이를 펼쳐본 은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이건…….”

은수의 반응으로 미루어 현준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며칠 전 누군가에게서 이것과 똑같은 내용의 인쇄물을 전해 받았을 것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 현준은 벌써 다 외워둔 시나리오를 읊기 시작했다.

“주변 지인 소개로 만난 지 석 달. 바쁜 일정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만났고 데이트 장소는 회사 근처의 카페나 한강 둔치. 그리고 지난 주말, 단골 바에서 레드와인을 마시다 반지를 건네며 프러포즈…….”
“저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언론에 배포될 보도자료 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솔직히.”

유도신문이라도 하는 듯한 현준의 눈길에 은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요구대로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잘 지어냈네요.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스토리고요.”

예상했던 대답이 전혀 아니었다. 현준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아, 그런데 이 프러포즈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고치는 게 좋겠어요. 전 레드와인엔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은수가 천진난만하게 덧붙인 말에 현준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더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정상입니까?”
“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듯, 은수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 얼굴을 보니 현준은 마침내 오장육부가 다 뒤틀렸다.

“아니, 이게 정상으로 보이냐고.”

갑자기 말도 짧아졌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너보다 일곱 살 더 먹었으니까 말 놓는다. 야. 우리 딱 까놓고 얘기해 보자. 너한텐 이게 정상으로 보이냐?”
배울 만큼 배웠고 생긴 것도 점잖은 사람이 초면에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다.
“나는 아니거든? 이거 아무리 봐도 엿같잖아. 아주 몸서리쳐지게 엿같잖아.”

은수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큰 눈만 끔벅이자 현준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거만한 포즈로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얼마 전부터 집에서 결혼하라고 하도 귀찮게 해대는 데다 그쪽 집안 배경을 탐내는 할아버지가 수차례 강요하기에 적당히 장단만 맞추고 있을 뿐, 난 결혼할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어.”

현준은 은수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늘은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듯 파랗기만 했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화가 났다.

“내가 이 나이에 거대 자동차회사 임원단 중 최연소로 사장 자리에 오른 게 전부 부모 잘 둔 덕이라 생각하지? 천만에. 회사가 이 정도로 덩치가 커지기 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부모가 아무리 잘 꽂아줘도 제 스스로 능력 없으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지. 그동안 내 자리를 노리고 덤빈 놈들이 어디 한둘인지 알아? 이게 다 누구한테 뺏길까 봐 정신병자처럼 집착하고 짐승처럼 미친 듯이 물어뜯어 내가 내 손으로 쟁취한 거야. 알아?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정도로 나, 한가하지 않아. 그러니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자식 낳고 하는 평범한 생활 따위 안중에 있기나 하겠냐고.”

은수는 가만히 현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얇은 안경렌즈 아래 자리한 그의 눈동자는 차디차긴 했지만 까닭 없이 깊은 색을 띠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다 제법 탄탄한 몸매의 소유자인 현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남이긴 했으나 이제 보니 그다지 호감이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저 표정 때문인 것 같다. 철저히 금욕적이고 무표정한 얼굴엔 냉기마저 서려 있어, 이 이상 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보였다.

“말 나온 김에, 너 내 별명이 뭔지 알아? 미친개야. 같이 살면 어떨지 눈에 훤히 보이지? 나중에 가서 네놈 때문에 불행해졌네, 인생 말아먹었네 하고 징징거리면 죽여버리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완전히 신세 망치기 전에 딴 데 가서 알아봐. 조금만 둘러봐도 세상에 좋은 새끼들이 얼마나 많냐. 너 그렇게 부모 말만 믿다가 인생 통째로 쓰레기통에…….”

듣기 불편할 정도로 끔찍한 현준의 독설은 이후로도 계속됐지만, 은수는 어쩐지 그가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장황한 독설에다 욕설까지 끼얹는다 해도 지금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하나다. 이 불행한 결혼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마음 돌리라는 것.

애초에 결혼 생각 따위 전혀 없던 건 은수 쪽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결국 불행해지더라도 집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나온 자리였다.
험악한 말을 일삼긴 해도 알게 모르게 배려하고 있는 현준과는 달리, 은수는 처음부터 상대의 사정 같은 건 눈곱만치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제야 다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이 길어지긴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오늘 집에 돌아가거든 신랑 될 놈이 미친개새끼가 따로 없어 도저히 이 결혼 못 하겠다고 통보해. 어영부영하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오늘 안으로 해라. 꼭.”

와인 한 잔을 더 따라 쭉 들이켠 현준은 주문한 식사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만요.”
“뭐.”
“혹시, 지금 사귀는 분 있으세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은수의 당돌한 질문에 현준은 일어서려다 말고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시선이었다.
은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귀는 분이 있더라도 결혼 후에 계속 만나셔도 괜찮아요. 절대 터치하지 않을게요. 참고로, 저는 따로 만나는 사람 없어요.”
“뭐 하자는 거야?”

현준은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쳤지만 은수는 진지했다.

“충고는 감사해요. 무슨 말씀이신지도 알겠고요. 하지만, 제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시는 게 아니라면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해주세요.”

은수의 당돌한 대답에 호기심이 일었던지, 현준은 룸에 들어온 이후 줄곧 위협적으로 굳히고 있던 인상을 풀었다.

“이유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현준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은수의 눈을 또 한 번 지그시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눈 속에선 어떤 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심연처럼 깊고 새카만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럴 만한 사정은 결국 네 사정이고, 남한테 휘둘려서 보모 역할 하는 건 사절이야.”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절대로 제게 신경 안 쓰시도록 잘할게요. 조용히 살라고 하시면 쥐 죽은 듯이 살게요.”
“신종 발목잡기냐?”

현준이 계속 시큰둥하자 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 이 자리가 불발된다면 같은 자리가 계속 이어질 거예요. 저는 이런 시간낭비 또 하고 싶지 않아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아마 그쪽도 똑같겠지요.”

반박의 여지가 없는지 현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은수는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그런 마음가짐이신데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럴 바에야 아예 터치 안 하겠다는 제 쪽이 편하지 않겠어요? 집안의 강요도 피할 수 있고 말이에요. 제가 장담하는데 이 결혼, 결코 불편하거나 손해날 일 없을 거예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건너다보기만 하는 현준의 모습에 애가 달았는지, 은수는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현준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일이 불발되면 이런 비슷한 자리가 계속 이어질 거란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즘 들어 부쩍 결혼압박이 심해졌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짜증을 참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결혼 후 터치하지 않겠다는 은수의 말이 진심이라면 현준에게 있어선 확실히 손해날 일은 없었다. 그러니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시하며 떼어내려고 했는데도 결혼을 하자고 하는 상대의 이유나 사정이 뭔지는 몰라도.

“어디서 과외라도 받았어?”
“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설득 제법 잘하네.”
“아…….”
“경고는 할 만큼 했으니,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난 모른다. 다 네 책임이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산뜻한 현준의 대답에 은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현준은 문득 이 기묘한 상황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요?”
“내가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르잖아.”

은수는 의외라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끝까지 모를 텐데요, 뭐.”
“뭐, 그건 그렇지.”

제법 길고 심각했던 대화는 요리를 서빙하러 들어온 웨이터 때문에 잠깐 끊어졌다.
테이블에 보기 좋은 전채요리들이 펼쳐지고 웨이터가 정중하게 인사한 후 룸을 나가자, 조금 전까지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던 룸 안에 평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은수가 돌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본 현준은 파란 하늘에 걸린 희미한 반달을 발견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낮달이네.”

몽롱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은수는 혼잣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낮달을 보면 어색한 기분이 들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은수가 턱을 괴며 고민하기 시작하자 현준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가리비 요리를 포크로 뒤적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게 당연하지.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놈이니까.”
“아! 어머! 네, 맞아요! 딱 그거다!”

별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뛸 듯이 좋아하며 맞장구를 쳤다.
예상치 못했던 은수의 반응에 현준은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낮달을 보고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래도 공통점 하나는 있는 모양이다.

완벽한 타인.
관계를 시작하는 시점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에게 환한 대낮 하늘에 걸린 달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존재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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