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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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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6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334g | 128*188*20mm
ISBN13 9788957075661
ISBN10 895707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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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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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얼굴은 부옇게 살이 올라 있었다. 아이는 자고 있다. 책상 위는 아침과 그대로였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면 그게 오늘이어야 했다. 나는 냅다 밥상을 뒤집었다. 남편의 벌린 입에서 밥풀이 후둑 떨어졌다.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건 가족이었다.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앓아누웠던 아버지가 죽기까지 그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걸핏하면 용돈 좀 보내달라는 준영이나 빚 독촉 전화를 대신 받게 하는 민영도 마찬가지였다. 밥만 축내면서 밤이면 취하다시피 잠든 마누라 배 위에 올라타 남자 행세 하려는 남편도 꼴 보기 싫었다. 가족이어서 더 그랬다.
화가 치솟으면 나도 모르게 밥상을 뒤엎고, 물건을 던졌다. 한번 상을 엎으니,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내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이런 기질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 남편은 어쩌지 못하고 아이만 끌어안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저 둘 때문에 울고 싶었다. --- pp.46-47

별채의 천장을 보며 누워 있으면 남자의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들리지 않던 그 소리가 점점 커지고, 선명하게 들리다가, 나중에는 콸콸콸 쏟아지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이 온통 물소리로만 채워진 것 같았다.
일을 끝내고 별채에서 나오면, 나는 꼭 물가에 들러 한동안 서 있곤 했다. 물은 느리고, 또한 무심하게 흘렀다. 시간도 그렇게 흐르기 마련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쪼그려 앉아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면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는 다시 왕백숙집 여자가 될 수 있었다. --- p.59

도로의 차는 대부분 물가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 같은 사람들일 것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써야만 하는 사람들, 몸 아니면 돈 버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방법을 차마 꿈꿔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이들에게는 가능한 꿈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 구부정한 허리로 느린 걸음을 걷는 이들이었다. 이모님은 언니에게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하라고 다그쳤다. 얼마나 진행이 된 것이냐, 고칠 수는 있느냐, 보험 같은 건 들어뒀느냐…….
수술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우리 같은 형편에 아프기까지 해? 그게 가장의 도리니? 엄마가 누운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매몰차게 말했다. 남은 식구들 고생시키고 죽기만 해봐. 내가 먼저 죽일 거야. 아픈 아버지는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게 엄마 속을 더 뒤집는 모양이었다. (……) 나와 민영은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는 엄마를 말리지 못했다. 민영의 등록금을 구하려고 온 식구들이 한창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데 병원비와 약값까지. 답이 없었다. 아버지도 간암이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자기 발로 찾아가 검사를 받고 알게 된 병명이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 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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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앉아 숨죽이고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고 또 지독하다. 김이설의 그녀는 생에 대하여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기대도 절망도 없다. 어설픈 환상도 어쭙잖은 환멸도 없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여자. 그러고 보니 언제 우리가 그 여자를 한번 눈여겨본 적이나 있었던가? 식당에서 마트에서 기계처럼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여자, 들꽃도 풀꽃도 되지 못하는 여자, 낭만적 반성도 윤리적 각성도 할 틈 없이 고단한 그 여자의 맨 얼굴을. 그 여자는 적어도 비겁하지 않다. 아무 데로도 도망치지 않는다. 지독하고 또 지독하게, 여기 그 여자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준 작가의 진심을 나는 믿는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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