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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 박범신 장편소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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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87쪽 | 594g | 128*188*30mm
ISBN13 9788927802235
ISBN10 892780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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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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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바닥에 정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평소엔 내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거기, 내 손바닥에 분명히 말굽이 들어 있다.
말굽이 생긴 뒤로 손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생명선의 상단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말굽으로 뭔가를 내려치면 칠수록 손금이 그만큼 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말굽의 힘이 강화되면, 생명선은 물론 손금이 모두 없어질는지도 모른다.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p.18

* 남자의 상반신이 이윽고 말쑥하게 드러났다.
운악산 칼바위에서 쏟아져 내려온 북풍이 남자의 벌거벗은 웃통에 예리하게 박혀들었다. 나는 이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단련이 잘된 훌륭한 몸매였다. 팔을 벌리자 가슴의 승모근(僧帽筋)이 산맥처럼 단번에 일어섰다. 어깨 삼각근과 양팔의 이두박근도 훌륭했다. 목에서 쇄골로 이어진 힘줄은 뚜렷한 V자를 그려냈으며 배에는 王자가 선연히 부조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과 뛰어나게 발달된 젊은 몸매의 부조화는 차라리 기괴했다. 이상하고 언짢은 부조화였다. 나의 시야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다시 나타난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칼날이 햇빛과 만나 번쩍했다. 장도(長刀)였고, 잘 갈린 진검(眞劍)이었다. 목이 움찔해졌다. 질이 좋은 진검은 쇠파이프도 자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타고난 무사의 풍모가 뚜렷했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 때의 칼날은 급류를 타고 오르는 날치 같고 내리칠 때의 칼날은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햇빛까지 두 동강 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찌르고 때로는 베고 때로는 허공을 날렵하게 가로 그었다. 재빠르게 내딛는 발끝은 유연해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떤 자세에서도 남자의 턱은 정면을 향해 꼿꼿했다. 눈에서는 이따금 푸른 섬광이 번쩍 뻗어 나왔다. 어떤 신념에 가득 찬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은 보다 투명해졌다.
칼끝이 나를 겨냥한 것은 한바탕의 춤사위가 끝날 무렵이었다. 찌르기 자세였다. 살기가 확 느껴졌다. 나를 겨냥한 것은 칼끝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화살도 문틈을 비집고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나와 남자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존재를 알고 있어, 라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과 남자가 한걸음으로 헛간의 문 앞까지 돌진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었다.---pp.30~31

* 창밖으로 귀를 열면 가랑잎들이 비탈길을 쓸고 가는 소리가 먼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노숙자로 떠돌던 남해 쪽빛 바다가 때로 그리워지기도 했다. 이 도시로 돌아오게 될까 봐 두려워 떠돌던 세월이었다. 죽을 때까지 결단코 오지 않으리라고 골백번은 맹세했었다. 감옥에서 4년, 부산에서, 마산-진해, 사천, 광양, 여수에서, 또 목포의 바다 끝에서 비렁뱅이 노숙자로 흘러 다닌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겨울바닷가는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틀이나 사흘을 완전히 굶은 적도 있었다. 굶고 누워 있을 때조차 겨울바다는 저 혼자 끝없이 깊어졌다. 백사장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칼바람을 견딘 날도 부지기수였다. 죽음 직전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잠이 들면 한 소녀를 찾아 헤맸다.
볼이 붉고 이마가 하얀 소녀였다. 처음엔 분명했던 얼굴이 시간 따라 조금씩 지워지는 슬픈 경험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아주 옛날에 볼 붉은 소녀가 있었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감옥에서 나올 때쯤 소녀의 턱과 입술이 지워졌고, 떠돌이로 10년쯤 지나자 콧날과 눈과 귀도 완전히 지워졌다. 소녀가 그리우면 피가 밸 때까지 손바닥으로 바위나 벽돌담장이나 철판 따위를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소녀의 얼굴은 완성되지 않았다. 손바닥에선 자주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흘렀다. 심지어 이름까지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닳아 없어졌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끓는 물에 손을 넣은 일도 있었다. 닳아 없어진 기억들은 복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조차 그냥 소녀…… 라고, 이름 모르는,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 라고만, 불러야 했다. 오랜 노숙자 생활에 그만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형태 없는 붉은 볼과 박속같이 하얀 이마와 짙은 눈썹 끝의, 팥알만 한 보랏빛 점 하나였다. 내 안에서 오래 묵어, 소녀는 마침내 전설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아주 옛날에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라고 나는 동화책을 읽듯이 자주 소리 내어 말했다.---pp.52~53

* 사막이 그리웠다. 내가 그리는 사막엔 해가 지지 않았고, 모래바람이 자주 불었으며,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바닷속처럼 고요했다. 보물 같은 것은 없어도 좋았고 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나도 무조건 사막으로 가고 싶었다. 사막이 너무 그리워 무릎 사이에 한참 동안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모래폭풍 소리가 들렸다.
밤에는 엎디어 짐짓 글을 쓰는 시늉을 해보기도 했다.
오래전, 정말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십대 때였다. 나의 소일거리는 책을 읽는 것과 암벽을 타는 일뿐이었다. 책을 읽고 암벽을 타고 책을 읽고 암벽을 탔다. 심심하면 개한테 소설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책을 읽어주면 난폭하던 개들은 조용해졌고, 빈사상태의 개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일어났다. 감동적인 힘이었다. 그 외에 내가 개를 위해 하는 일은 사료를 주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개를 잡는 일엔 나를 절대로 끼워 넣지 않았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고 아버지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안 먹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특수부대 장교들이 아버지를 양쪽에서 꼼짝 못하게 잡고 개고기를 강제로 입안에 마구 밀어 넣은 일이 있었다. 장교들 손을 뿌리치고 잽싸게 도망친 나는 암벽 꼭대기에 숨어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뙤약볕 아래 웃통을 벗어부친 장교들이 낄낄거리면서 아버지의 입에 개고기를 쑤셔 넣었다.
“자기는 안 먹으면서 개고기를 판다는 건 부도덕해!”
“그렇지. 불륜과 같아!”
젊은 장교들은 소리쳤다. 부도덕한 아버지와 부도덕한 나의 시선이 찰나적으로 마주쳤다. 아버지의 번질번질한 눈가에 햇덩어리가 타고 있는 게 보였다. 배를 잔뜩 불린 장교들이 몰려 나간 뒤에야 은행나무 밑에서 아버지는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다. 고막을 쇠꼬챙이로 뚫려 듣지도 짖지도 못하는 조용한 개들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pp.107~108

* 나는 불길 속으로 부나비처럼 뛰어들었다. 나에겐 증오로 만든 창(槍)이 있었으며, 그러므로 사랑에의 열망으로 빚은 뜨거운 화살과 전통(箭?)도 있었다. 지옥인들 가지 못할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린 그녀는 불길이 잡아먹다시피 한 거실 한 귀퉁이에 혼절해 있었다. 그녀를 먼저 둘러업고 나왔다. 현관 일부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아, 아버지!”
혼절에서 깨어난 그녀가 몸부림쳤다.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누구를 말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몸부림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현관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불지옥을 그녀는 가리켰다. “가라!”라고 나의 여신이 내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를 구하러 다시 불지옥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때마침 도착한 소방차에서 물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거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물과 불의 지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을 안방 쪽으로 무작정 내닫는데 천장에서 쏟아져 내린 무엇인가가 머리와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pp.118~119

* 말굽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말굽의 단점은 손금과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살인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강고해지는 건 진정으로 황홀하면서도 고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했다가 내 안에서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우주까지 다시 확장시키는 경험이 그럴 터였다.
나는 점점, 그러면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제 내 육체를 유린할 수 없을 것이며, 샌드백처럼 다루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둠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밤이 되면 명안진사도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칼날 같은 그믐달빛에 의지해 나는 랜턴도 켜지 않고 가볍게 암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열패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근육들이 산맥처럼 일어서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곧 암벽이고 암벽이 곧 나였다.---pp.180~181

* 갑자기, 너무도 간절하게 여린이 그리웠다. 밑도 끝도 없이 다가든 그리움이었고, 폭력보다 더 폭력적인 그리움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 차라리 통증이었다. 명치가 찢어지는 고통이 왔다.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숲 사이로 걸었다. 나뭇가지들이 달려들었다. 눈두덩이 찢어진 듯, 피가 배어나왔다. 내부의 통증은 이제 명치를 찢고 간장(肝臟)을 찢고 염통을 찢었다. 올 때와 달리 나는 상처받은 짐승이 되어 걸었다. 여린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p.193

* 무한한 슬픔이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았다.
이유도 없고 단계도 없고 근원도 없는 슬픔이었다. 포악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짐짓 돌아서서 주차장 쪽을 멀리 우회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더 이상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플루트 소리 역시 나의 귀를 찢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그랬듯이 맑은 플루트 선율이 갑자기 슬픔이 되어 내 빰을 스쳤고, 잔설이 버석거리며 내 신발을 감쌌고, 마른 풀들이 내 종아리에 자꾸 감겼다. 얼어붙은 연못이 다가왔다. 나는 연못가 빈 정자에 간신히 기대섰다. 플루트 소리가 멈춰 있었다. 식당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식당을 나온 애기보살과 이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무실을 나선 백주사가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두 햇빛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애기보살이 뭐라고 했는지 이모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얼른 돌아서서 얼어붙은 연못을 보았다. 나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감정은 슬픔이었다.---pp.202~203

* 나의 슬픔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었다. 허공과 같았다. 샹그리라로 돌아와 창 너머로 운악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더니, 유리창을 보는 건지 운악산을 보는 건지, 또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가책도 없었고 노함도 없었고 미움도 없었다. 사랑과 욕망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아 있는 감정은 단 하나, 이유 없는 덩어리, 슬픔뿐이라는 걸 나는 그날 밤 깨달았다.---p.206

* 놀이 타는 듯이 붉었다. 열네 살 그녀의 새하얀 이마엔 지금처럼 핏줄이 파르스름하게 불거져 나와 있었다. 피돌기가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그 핏줄에게, 피돌기에게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만 기억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가르고 내리닫이로 흐르는 그 핏줄을 보았다. 파르스름한 그곳에 귀를 갖다 대면 멀고 싶은 강물 소리가 아스라이 들여올 것 같았다.---p.240

* 분명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나 나를 보고 있었다. 우물 밑이라도 다 들여다볼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경혈에 붙은 삭정이의 불꽃이 어느새 몸 전체로 옮겨 붙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 나라고 믿고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증거는 완벽했고 사법부는 내게 4년형을 언도했다. 그녀를 구하고 난 뒤 그녀의 아버지를 구하러 다시 불 속에 뛰어든 것조차, 취조형사는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를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개백정’의 사악한 ‘새끼’가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은 철저히 은폐되고 조작됐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면밀하게 연출한 힘 있는 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p.310

* 꿈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고개를 끄덕거려주자 입을 벌려 웃었다. 누리끼리한 잇속이 혐오감을 주었다. 말굽은 이미 제 할 일을 다 감지한 눈치였다. 꿈틀했다. 일어나려는 그녀를 도와 침대 위에 간신히 앉혔다.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말하기가 너무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에 손가락을 대 보이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고 섬세히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주물러주던 여린의 손길이 세세히 기억났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마음을 다독거리기 위해 고갯짓을 하면서, 살 속 깊이 손가락을 박아 넣어 나는 그녀의 뼈를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의 숨긴 뼈들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가늘었다.
“꿈…… 이겠지, 이것이. 마치…… 신방에 든 거 같네…….”
내 손바닥이 입을 막았으므로 그녀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말굽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벌써 독이 잔뜩 오른 말굽이 생생히 느껴졌다. 말굽의 유일한 인정주의는 제 힘을 창끝보다 더 예리하게 모아 대상을 가급적 단 한 번에, 단호하고 깔끔하게 쪼개는 것이었다. 망설이거나 하진 않았다.
나의 말굽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먼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음에 다른 손으로 힘차게 두개골을 내리쳤다. 그녀의 두개골은 상한 생선의 비늘처럼 연약했다. 그러나 옹골차게 지켜온 목숨이었다. 뇌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지만, 살아온 관성을 좇아 버르적거렸기 때문에, 나는 여러 번 내려쳐야 했으며, 한참이나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강력하게 틀어잡고 있어야 했다. 쏟아져 나온 뇌수가 무절제하게 흘러내렸다. 손바닥은 물론이고 앞섶에도 뇌수가 묻었다. 그녀가 잠잠해진 다음, 나는 손바닥을 커튼에 문질러 꼼꼼히 닦아야 했다.---pp.321~322

* 그러므로 나는 슬픔 때문에, 슬픔을 따라가서 그를, 그들의 두개골을 내려앉혔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어떤 슬픔이냐고 반문한다면 반문하는 그의 두개골도 단연코 쪼갤 터였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픔은 언제나 그냥 하나의 슬픔뿐이며, 분파되지 않았다.---pp.340~341

* 그렇지만, 그녀는 나에게 여전히 ‘아주 옛날에’ 있었던, ‘보랏빛 점’을 가진 꿈속의 소녀였다. 나를 위해 세계의 폭력에 맞서준 유일한 전사였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서 우주의 순결한 바람을 넣어준 단 하나의 어린 천사. 세상이 그녀를 어떻게 다루든지, 뮳게 있어 그녀는 결코 훼손되지 않을 ‘존엄’이었고, ‘감미’였으며,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자연법이 만든 최고의 가치로서, 영원히 훼손될 염려가 없다고 나는 믿었다.---pp.398

* 아름다움이란 도착점인가 출발점인가.
그날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만약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오랜 풍상을 겪은 뒤에 만나는 마지막 발화라면, 나는 뒤로 물리지 말고 그녀를 당장 차지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의 모든 뼈들조차 실팍하고 섬세히 부순 뒤 그녀의 살과 머리칼과 내장까지 유쾌하게 거기 버무려서 남김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 유장한 길의 출발점이라면 어쩔 것인가. 단지 나의 슬픔에 밀려 그녀를 먹어치우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비윤리적인 죄업이 될 터였다.---p.401

* 겨울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가 자꾸 길도 없는 곳으로 앞장서 내달리는 바람에 간신히 쫓아가 어깨를 붙잡은 곳이 바로 여기 어디쯤이었다. 어깨를 붙잡힌 열네 살의 그녀는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빠처럼 눈이 멀 거래.”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실명으로 가는 불치의 유전병이 자신의 몸속에서 시시각각 자라고 있다는 걸 그녀가 최초로 알아차린 날이었다.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나서 암벽으로 올라가 뛰어내릴 셈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날이 저물도록, 우리는 그날 이 부근에 앉아 있었다.
강을 물들이며 시작된 놀이 유독 황홀한 날이었다. “나는 흰색과 붉은색이 젤 좋아, 오빠. 언젠가 죽으면 햇빛, 아니면 놀이 될 거야!” 그녀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실명될 것을 예시 받고 그녀가 먼저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고, 죽음의 빛깔로 그녀가 서슴없이 선택한 것은 흰 햇빛, 붉은 놀이었다. 죽고 싶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해서 죽음이 먼 것은 아니라는 걸 그녀와 내가 확인하고 동의한 날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우물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그녀 안으로 깊이 엎드려, 그녀의 우물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피를, 마음껏 빨아마셨다. 그녀의 피는 희고 붉었으며, 따뜻하고 달고 향기로웠다. 나는 놀랐고, 감동했다. 미각만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혀가 천 개로 갈라지면서 길게 길게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을 때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예민한 감촉이었다. 빨아 마시는 것도 모자라, 나는 천 개의 긴 혀를 그녀의 심장에 더 깊이 박아 넣어, 좌심실 우심실 좌심방 우심방은 물론,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간 여러 동맥의 붉은 내선을 따라, 그녀의 몸속에 숨겨놓은 모든 우물물을 섬세히 핥아먹었다. 따뜻하고, 달고, 향기로운 에너지가 나의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쁘고 뿌듯했다. 본성을 찾아 가진 것 같았다.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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