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한 형제들의 피가 새 신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때 요한은 그들을 양육했다. 바울, 바나바, 실라, 아볼로, 누가, 디모데, 디도 그리고 기타 많은 선교사들이 열심히 서쪽으로 교회를 넓혀나갈 때 요한은 교회의 기초를 받쳐주었다. 비판자들이 교회에 욕을 퍼부을 때 요한은 변호했다. 사이비들이 교회를 변질시킬 때 요한은 그들의 정체를 파헤쳐 드러냈다. 거짓 선지자들이 진리를 오도할 때 요한은 그들의 이단적 메시지를 논박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세 편의 편지에 응축시켰는데, AD 65년경에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맨 처음으로 그 편지들을 돌려가며 읽었다. --- p.20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살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로 추적해 올라갔고, 누가는 그분의 뿌리를 첫 인간인 아담에게로까지 추적해 올라갔다. 그러나 요한은 물리적 피조물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 그 리스도 안에 생명과 빛이 있었다고 진술한다. 생명과 빛은 모세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과 연결시켜 사용한 두 가지 이미지다. 창조주는 말씀으로 우주를 지으신 후에 자신의 진리의 빛이 우주에 충만하게 하셨다(창 1:3). 이어 창조주는 각종 식물과 바다 생물과 새와 육상 동물 그리고 당신의 최고 걸작인 인간으로 지구상에 생명이 충만하게 하셨다. 그분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어주셨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다. --- p.41
3장 3절에 ‘거듭’으로 옮겨진 헬라어 단어 an?hen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흔한 번역은 ‘위에서’다. 요즘 우리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으로 쓰는 ‘위에서 도우셨다’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단어에 담긴 ‘위에서’와 ‘거듭’이라는 뜻이 합해져 심오한 진리를 예시해주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것은 이중적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메릴 테니(Merrill Tenney)의 말대로, “출생은 우리가 세상에 들어서는 방식이며, 이 세상에 적응할 잠재적 소양도 출생과 더불어 온다.” 출생은 생명의 종류와 환경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일이다. “거듭난다, 또는 ‘위에서 난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세상에 들어가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변화를 뜻한다… 천국에 속하려면 그 나라에서 태어나야 한다.” --- pp.93-94
현대 문화는 지도자의 자질을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능력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내가 평생 목회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진리란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진리를 감추고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추종 세력을 대거 끌어 모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미지를 파는 것이다. 집결의 구심점이 될 상징과 증오의 대상이 될 상징을 하나씩 만들어내라. 상징은 거창하게, 메시지는 단순하게 하라. 사람들의 가장 깊은 필요에 영합하고, 당신만 따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설득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짜 진실은 숨겨두라. 그러려면 절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게다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보기로 벌을 주어야 한다. 그 보상으로 당신은 거대한 추종 세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된다.
반대로 진리는 거대한 추종 세력을 끌어모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진리는 못 그릇 속의 자석처럼 적들을 끌어모은다. 그래서 경건한 지도자에게는 용기와 끈질긴 자세와 오뚝이 근성과 무엇보다도 겸손이 필요하다.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은 이미지나 박수나 여론이나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은 그냥 진리를 제시하고, 그 진리가 사람을 끌어들이든 밀어내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 p.139
언뜻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3장 17절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 단어 krisis(3:17)와 krima(9:39)의 근소한 차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krisis는 심판하는 행위를 뜻하고, krima는 심판의 결과를 나타낸다. 3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 적이 사람들의 죄를 묻거나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셨다. 그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실 것이다(단 7:13-14, 계 20:11-15).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매번 그 만남은 진실의 순간이 되었다. 각 개인이 빛이신 그분께 보이는 반응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드러내준다는 뜻이다(3:19-21).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서면 마침내 선과 악의 참된 본색이 드러난다. --- p.237
고백컨대 내가 간혹 괴로울 때 되뇌는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에 의로우시며”라는 말씀은 그저 말뿐인 것 같고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마침내 주님이 개입하셔서 그분을 향한 나의 신뢰가 옳았음을 확인해주실 때까지 그 말씀이 나를 안정시켜준다. 비록 그분이 내 바람대로 설명해주실 때는 드물지만, 말로 가닿을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그분의 영이 내 영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나는 선하신 하나님의 흠 없는 성품과 완전한 계획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 --- p.262
요한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공적인 사역의 마지막 날들을 기술하면서, 사실적인 말투로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고의로 거부해왔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그 자기기만에 내버려두셨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유기의 형벌’이라고 한다. 하나님 편에서 엄한 사랑으로 내리는 이 결정은 수동적인 방출이 아니라 구속(救贖)을 목적으로 한 능동적인 ‘내버려둠’이다. 주님이 누군가를 죄에 내버려 두실 때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 결과가 중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엎드러져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천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항을 고집할 것인가를 가르는 결정적 순간이다. --- p.267
미국인들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지 않다. 감히 말하건대 미국은 후기 기독교 국가도 아니다. 이제 나는 우리가 반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다고 이전 어느 때보다도 확신하고 있다. 언제 이렇게 흐름이 바뀐 것일까?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헐뜯는 유머가 정치적 공정성의 이름으로 금기된 상황에서도 유독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만은 예외이며, 대중문화는 신성모독을 즐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는 박해의 물결이 곧 뒤따르게 되어 있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사실이다. --- p.344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및 그분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정의하셨다. ‘안다(gin?k?k)’는 단어는 그냥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지하기보다는 ‘이해하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에서 왔다. 이 말은 생각과 가치관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암시하며, 그 주고받는 사람들은 서로 허물없는 사이다. 친한 친구들이나 결혼한 부부의 관계까지도 이 단어로 묘사된다. 영생이란 긴 삶만이 아니라 풍성한 삶이다(10:10). 많은 양에 높은 질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런 만족은 개개인이 본연의 지음받은 목적을 이룰 때에만 누릴 수 있는데, 그 목적이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 pp.368-369
아무도 몰래 혼자서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더 힘든 상황은 내 생각에 별로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므로, 정의는 하나님이 주신 뿌리 깊은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에 우리가 갈망하는 정의는 철저히 이 기적인 추구로 변한다. 억울한 감정은 정의를 요구한다. 원한은 복수를 부르짖는다. 자기 중심적인 절망감은 하늘의 위안을 갈구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은 대변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는 내내 세상은 우리의 고난을 남의 일인 양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렇게 외롭고 억울하게 혹독한 시련을 당할 때면 하늘의 침묵이 고문일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남모르게 고난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방이 당신의 평판을 더럽혔다. 뒷말이 당신과 당신이 존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거짓 고소가 당신의 인생길을 바꾸어놓았다. 정작 잘못한 사람들에게 가야 할 박해가 당신에게 왔고, 게다가 그 가해자들이 정말 악한 사람들일 수 있다. 장담컨대 주님은 당신이 도움과 희망을 찾아 부르짖는 소리를 반드시 들으실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도 당신을 모른 체하지 않으셨다. 혹 당신이 원하는 때나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그분은 억울함을 풀어주신다. --- pp.403-404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무렵, 황제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일상적 행정 업무를 자기가 믿던 오른팔 루키우스 세자누스의 손에 맡기고 카프리 섬의 화려한 별장으로 물러났다. 세자누스는 소부대에 지나지 않던 황실 경호대를 황제 친위대로 탈바꿈시켜 황제의 신임을 얻었는데, 일종의 비밀 경찰인 황제 친위대는 로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묘한 술책과 폭력적 음모를 통하여 약삭빠르게 자신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가 죽인 정적 가운데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아들인 드루수스도 있었는데, 이 불운한 남자를 세자누스는 그의 부인의 도움 으로 서서히 독살시켰다.
드루수스가 병사한 듯 사라지자 세자누스는 사실상의 로마 수뇌로서 세도를 날렸고, 제국에서 가장 이름난 임지 가 운데 하나인 유대 총독 자리가 자기 친구 본디오 빌라도에게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그 자리는 아주 골치 아픈 자리였지만, 반면 제국에서 정치적으로 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보장된 자리이기도 했다. 세자누스는 유대인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유대를 평화롭게 복종시킬 수 있는 강한 통치자를 원했다. --- p.410
요한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다 알리기보다는 충분히만 알리기로 했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그의 내러티브도 유한하다. 이 땅의 삶의 모든 것을 합해도 천국에서의 가장 작은 것보다도 부족하다. 그래서 요한은 독자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목표만 달성된다면, 그는 그들도 장차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알게 되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을 완전히 다 알고 싶다면 그분을 믿으면 된다. 그러면 영원 속에서 마음껏 그분을 깊이,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계 22:3-5).
--- p.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