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붕에만 올라가면 내 국적이 헷갈리는 걸까. 한국, 필리핀에 이어 혹시 내 국적이 일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소리 내지 않고 걷다보면 내가 꼭 일본의 자객, 닌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닌자처럼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지붕에서 지붕으로 날아다닐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닌자보다 한 수 위였다. 일본의 지붕은 닌자의 염탐을 막기 위해 단단하고 두껍게 만들어졌다지만 명왕3동의 지붕은 아니었다. 달걀 껍데기나 마찬가지였다. 천왕시 해왕구 명왕3동. 서른아홉 개의 쓸 만한 지붕과 2백 개의 달걀 껍데기 같은 지붕을 가진 명왕3동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골목과 집이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다. --- p.14
지붕만큼 황홀한 공간이 또 있을까. 어쩌면 이 지구 위에 처음 집이라는 ‘물건’을 만든 사람은 아궁이나 방이 아니라 지붕이 필요해서 집을 지은 건 아닐까. 어설픈 옥상에는 수없이 올라가 보았지만 나는 아직껏 지붕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지붕 위로 올라간 사람을 본 적은 있다. 초혼(招魂) 장면을 목격한 건 아홉 살 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어른 중 누군가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른은 할아버지의 저고리를 흔들면서 할아버지 택호를 소리쳐 불렀다. 돌아와 달라고. 지붕 아래 우리는 그 모습이 무섭다 우습다 울다가 웃다가 했다. 펄럭이던 저고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청혼(請婚) 때문에 지붕 위로 올라간 친척이 있다. 제대하고 시골에서 상경한 그는 눈이 큰 서울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청혼을 했다. 소식을 듣고 상경한 노모는 아들의 청혼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눈만 크고만. 아들은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자취집 지붕 위로 올라갔다. 서울 지붕은 어째 더 높아 봬. 그 아래에서 간담이 서늘해진 노모는 내려오라 사정했고 아들은 버텼다. 허락해달라고. 아들이 이겼다. 노모는 서울 아가씨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야 했다. 두 혼, 초혼과 청혼의 장소로 지붕만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래서일 것이다. 지붕이 나에게 더없이 황홀한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은. 평택 대추리와 용산과 왕십리가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될 왕십리들. 몸도 마음도 게을러 현장에서 함께 하진 못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사람들에게 지붕들에게. 포클레인에 찍혀나가는 지붕들을 어디로든 날려 보내주고 싶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잡지 못할 곳으로.
이건 울음 눌러 삼키는 어린 아이의 말이다. 우습고 재밌고 애처롭다. 아버지 없이 필리핀 엄마와 사는 아이의 눈에, 곧 철거될 마을 ‘명왕3동’은 무얼까. 어두울 수밖에 없는 풍경을 아주 밝게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이 이야기에선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흙 한 자밤 속에도 무수한 생명이 산다던가. 현미경을 들이대듯 아이는 청진기로 어두운 명왕3동의 무수한 삶의 소리를 엿듣는다. 아기자기하고 어처구니없고 기발하고 엉뚱하고 믿을 수 없고 그럴싸하고 눈시울 절로 뜨거워지는 이야기가 끝없이 샘솟는다. 줄거리에 예속되지 않은, 저 스스로 해방된 신기하고 곡진한 얘기들이 우와, 탄성 터져나올 만큼 스멀스멀 꾸역꾸역 퍼져나가 하늘을 덮고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이제 그 어떤 기담(奇談)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삭막한 현대, 도시. 그 한복판으로 아름다운 설화가 물길처럼 복원되어 돌아온다. 꿈꾸는 모든 일이 언제든 가능할 수 있다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설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것. 이 소설의 복된 덕목이다.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명왕성’은 오늘도 여전히 자기 궤도를 돌고 있다. 애오라지 향하던 태양을 잠시 뒤로 하고, 아이가 그랬듯 청진기 귀에 꽂고 저 어둠 속 명왕성을 응시하자. 터질 듯 육박해 오는 사람살이의 북적거리는 생기 앞에, 아, 이걸 다 어쩐다지? 눈물겨워 못내 아연해지자. 구효서 (소설가)